OWVBICS,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
키스 에이프, 지드래곤 앨범 아티스트의 집들이.
찰스 셰든은 대중에게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조차 고민되는 그의 활동명 OWVBICS는 더욱 낯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에서든 어디든 한 번이라도 본적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잊지 못하는 게 그의 작품이다. 거침없는 색감, 대담한 듯 치밀한 브러쉬 스트로크,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장난스럽기까지 한 감성. 셰든 특유의 거칠고 유머러스한 스타일은 일찍이 인정받았다. 무명 시절의 키스 에이프는 아티스트를 고용할 형편이 못 되었지만, 그의 그림이 너무 좋아 싱글 표지를 청하며 무리한 부탁을 할 정도였다. 물론 “일주일에 그림을 몇백 개 씩 그리는” 셰든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그림들로 가득 찬 셰든의 브루클린 스튜디오에서 키스 에이프와 작업에 얽힌 사연을 들었다. 그밖에 지드래곤이 가장 선호하는 예술가가 되기까지의 과정부터, 일 년 간의 투병 생활에서 얻은 깨달음 그리고 힙합 ‘덕후’로서 그가 추천하는 최고의 신인 크루까지. 셰든이 하나하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화끈한 그림과는 달리 차분하고 조용하게.
학교 전공은 순수예술이지만, 컴퓨터공학과와 부동산 시장에서 경험을 쌓은 독특한 이력이 있다.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 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과 예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학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4년간 학비가 무료인 쿠퍼 유니언에 지원하고 입학하게 되었다. 수강하면서 애플에서 투자를 받은 작은 컴퓨터 회사에서 디지털 음악 아카이브를 관리하는 일도 했다. 수업은 일주일에 2~3일 안으로 몰아넣고 나머지 시간에는 회사로 출퇴근했다. 그리고 졸업반 때는 가구 회사에서 목공 일을 했다. 그때 배운 기술은 오늘날도 작품의 액자를 직접 만들면서 잘 활용하고 있다.
졸업 이후 생계 유지를 위해 뉴저지에 살면서 부동산 일을 했는데, 건물 두 채를 2년 동안 임대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로 예술인들과의 사교 생활은 즐길 수가 없었다. 빌딩 사업 때문에 화가 활동도 익명으로 했다. 입주자들이 내 이름을 검색해서 누드 여자 페인팅을 찾으면 곤란하니까(웃음). 그래서 펜네임으로 무작위의 알파벳을 고른 것이다.
일 년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아팠던 경험은 본인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었나?
라임병 때문에 일 년 동안 입원해 있었다. 건강 때문에 일 년을 버린 셈이지만, 그 대신 미래를 얻었다. 그 이후로는 타인과 협업하는 데 훨씬 더 마음이 열렸다. 페인팅은 굉장히 고독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왜 주로 여성을 작품 소재로 다루는가?
어릴 때 그림 그리기를 연습하기 위해 누나의 <보그> 잡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베끼곤 했다. 하지만 그림은 절대 실제 여자만큼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실재론적인 그림 그리기를 그만뒀다. 사람들은 여성 그림을 원시 시대부터 그려왔다. 나는 내 작품을 통해 과거를 미래로 이어나가는 것이다.
힙합 음악을 향한 열정은 언제 시작되었나?
런 DMC 시절부터. 랩은 듣기만 하고 참여하지 않아도 돼서 순수 낙으로 즐긴다. 프로디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의 퍼포먼스를 볼 기회가 있었다. 웨스트사이드 건과 컨웨이 더 머신의 첫 뉴욕 무대였다. 프로디지, 메이헴 로렌, 락 마르시아노 그리고 레이퀀이 함께 공연했다. 프로디지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역사적인 밤이었다.
나의 여름 사운드트랙은 샤바즈 팔라스다. 그리고 미국 아칸소주 기반의 프레스코 그레이라는 어린 힙합 크루가 있는데, 그들은 내가 여태 들은 음악 중 가장 좋은 노래를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음원을 낸 기가 막힌 친구들이다.
키스 에이프와의 관계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그가 나를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이메일을 보내왔다. 내가 지드래곤과 작업한 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당시 키스는 완전한 신인이었고 알려진 곡도 없었다. 그는 서툰 영어로 내게 돈이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의 첫 번째 싱글 앨범 아트를 부탁했는데, 그의 겸손한 자세가 마음에 들어서 노래를 듣기도 전에 흔쾌히 승낙했다. 그가 원하는 타입의 그림을 일주일에 몇백 개씩 그리던 참이라 어렵지 않았다. 이제 키스는 나와는 무관하게 아주 잘나가고 있어 보기 좋다.
처음 키스의 노래를 들었을 땐 언어 장벽 때문에 그의 음악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귀를 다시 열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1990년대 초반 랩만 듣고 그 이후의 힙합은 형편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힙합은 죽지 않았다. 프로디지가 무대에 섰을 때 그는 “보라, 아직 우리의 음악이 이리 좋지 않으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드래곤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나의 작품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지드래곤의 해외 매니저를 담당한 분이 내게 연락하고 그와의 뉴욕 미팅 일정을 잡아줬다. 처음에는 트레이딩 카드만 부탁했는데, 콘서트나 전시 티켓으로 바뀌면서 결국에는 지드래곤의 <쿠데타> 앨범 표지가 되었다. 소호에서 처음 만났는데, 트럭에 그림 10개를 싣고 가서 지드래곤과 그의 스태프들에게 다 줘버렸다. 그들은 의아해했지만, 나를 신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지드래곤은 뉴욕에 올 때마다 내 작품을 사간다. 그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조지 콘도와 루돌프 스팅겔 같은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작품을 수집하는 사람이라 기분이 무척 좋다. 재밌는 건 그의 브랜드 피스마이너스원의 로고는 아마도 나의 ‘피스플러스원’ 시리즈에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평화 기호와 정지 신호를 합한 작품들이다.
몇백 개의 작품 중 ‘잘 나온 것’을 선정하는 기준은?
내 작품은 항상 색감에 대해 칭찬을 받지만, 색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그저 전 작품에 썼던 팔레트에 묻어 있는 물감을 그대로 다시 가져다 쓴다. 실제로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색감을 잘 고려하지 않으니까. 예를 들어 내가 오늘 당신이 내 파란색 소파에 앉아 있는 초상화를 그린다면, 당신은 의도적으로 내 소파와 옷을 맞춰 입지 않았으니까, 굳이 색깔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잘 나온’ 페인팅은 한 번에 쉽게 나온 것이다. 그리는 작품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 실패한 그림이 된다.
어느 특정한 예술 장르나 아티스트에서 영감을 얻는 편인가?
모두의 작품에 반응하지는 않지만, 누구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난 그 사람의 팬이다. 특히 톰 프리드먼(위 왼쪽), H.C. 웨스터만(위 오른쪽) 그리고 찰스 부코스키 작가들의 작품을 선호한다. 어느 한 스타일을 너무 많이 빌리는 것도 좋지 않지만, 난 그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그 어떤 것도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니까. 초상화는 원시 시대부터 그려져 왔다. 아티스트로서 남에게 비교당하는 것은 피해야겠지만, 난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나는 타인에게서 아이디어를 빌리고, 다른 사람도 나에게서 빌리면 좋겠다.
물감 외 다른 소재로도 작업하는가?
책도 쓰고 가구도 만들며 다채로운 작업을 하기 원한다. 최근에는 처음으로 그라피티 아티스트들과 함께 벽화도 그렸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맞춰 영상도 제작했다. 솔 르윗이라는 아티스트가 있는데, 각종 미술관에 본인의 작품 설치 방법을 적어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예를 들어 ‘벽 전체를 원색 줄로 채워라’ 등 하는 사람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설명서다. 이같이 나도 영상 프로듀서에게 디테일한 설명서를 작성해줬다. 미국 독립선언을 모두 반대말로 다시 썼다. 영국에서부터 독립하기 위해 쓰인 독립 선언이라 영상에서는 누군가가 영국 발음으로 통독했으면 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은 여자 그리고 특히 흑인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아서 흑인 여자가 읽었으면 했다.
지드래곤과 협업할 때도 비슷한 작업 과정이었다. 그는 빨간색, 흰색 그리고 검은색이 들어간 그림을 원한다고만 전했다. 그래서 결과물이 무척 흥미로웠다.
많은 인기 뮤지션과도 작업하고 여행도 많이 하는 OWVBICS.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나?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싶다. 숲속에서 초상화만 그리고 싶다. 예술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데, 나는 그리는 사람의 얼굴뿐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도 그리고 싶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거의 상담 치료를 하는 것이다.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느긋하게 대화하며 그림에만 전념하고 싶다. 내게 도시를 벗어나는 건 아주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