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 Road: 2023 현대 뉴 그랜저
6년 만의 세대교체로 돌아온 원조 ‘코리안 럭셔리카’.

자동차 마니아에게 운전은 단순히 기술적인 행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Open Road’ 시리즈는 자동차의 기능뿐만 아니라 그 차가 지닌 의미에 대해 탐구합니다. 오래된 차든, 새 차든, 해외의 이국적인 차든 상관없이 말이죠. <하입비스트>는 단순히 숫자로만 설명되는 성능 너머, 자동차가 선사하는 순수한 즐거움을 파헤칩니다.
그랜저는 현대자동차의 기함이다. 야구로 치면 ‘4번 타자’, 혹은 ‘에이스 선발 투수’라는 뜻이다. 누구나 아는 이 사실을 굳이 언급하며 시작하는 이유는, 현대자동차 스스로도 이번 7세대 그랜저가 자신의 플래그십 모델임을 몇 번이고 강조하며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랜저가 처음 출시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이때만 해도 수입 럭셔리 세단을 한국에서 만나는 일은 <포켓몬 고>에서 전설의 포켓몬을 마주치는 것만큼이나 드물었다. ‘국산 럭셔리 세단’에 방점을 찍은 채 출시된 1세대 그랜저는 현대자동차와 미쓰비시 자동차공업이 함께 만든, 국내 최초의 전륜구동 대형 세단이다. 특유의 각진 디자인과 전장 4865mm의 거대한 차체를 앞세운 그랜저는 당시 대우 로얄 시리즈가 장악하고 있던 국내 대형차 시장에서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고 그와 동시에 ‘자수성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지난 36년 동안 그랜저가 줄곧 ‘국산 럭셔리 세단’ 최강자의 자리를 지켜왔던 것만은 아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국내 자동차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지금과 달리 ‘럭셔리’가 자동차 시장에서 보증수표로 통하지 못하던 시기다. 그로부터 1년 뒤 공개된 3세대 ‘그랜저 XG’는 럭셔리를 덜어내는 대신 ‘운전의 재미’에 초점을 맞췄고 계획대로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출시된 4세대 TG와 5세대 HG 역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지만, 2000년대 들어 그랜저는 같은 집안에서 나온 에쿠스, 제네시스에게 ‘기함’의 자리를 내줘야만 했다.
하지만 또 한 번 시대는 바뀌었다. 지금 한국은 7천만 원이 넘는 메르세데스-벤츠 E 클래스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다. 쉽게 말해 한국 자동차 시장은 ‘럭셔리’가 통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이번 7세대 그랜저는 ‘기함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어야만 했다. 여기서 현대가 선택한 전략은 1세대 모델의 재해석이다. 현대차 디자인팀은 신형 그랜저에 1세대 디자인을 대거 적용할 것이라고 예고해, 공개 이전부터 엄청난 기대를 불러 모았다. 그렇게 지난 11월, 6년 만의 세대 변경을 거치고 돌아온 ‘디 올 뉴 그랜저’는 어딜 가든 뜨겁게 주목받고 있다. <하입비스트>는 본격적인 고객 양도에 앞서 7세대 그랜저를 직접 만나 그 진가를 면밀히 살펴봤다.
신형 그랜저를 처음 보자마자 든 생각은 ‘크다’는 것이다. 신형 그랜저의 전장은 이전 세대(F/L)보다 45mm 늘어난 5035mm로, 역대 그랜저 중 가장 길며 제네시스 G80보다도 길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전면부에 길게 배치된 ‘수평형 램프’와 ‘파라메트릭 패턴 라디에이터 그릴’이다. 새로운 그랜저를 기다리던 사람 중에는 ‘스타리아의 주간주행등이 적용된다’는 소식에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새 램프와 그릴이 신형 그랜저를 돋보이게 하는 가장 큰 요소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도어 디자인 역시 새롭게 바뀌었다. 언락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내부에 숨겨진 도어 손잡이는 깔끔하면서도 우아한 인상을 자아낸다. 여기에 헤드램프부터 리어램프까지 측면 전체에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캐릭터 라인은 외관 전체를 더욱 길어 보이게 한다.
한편 그랜저의 진가는 실내로 들어서야 알 수 있다. 운전석 전면에는 1세대의 ‘원 스포크 스타일’을 오마주한 새로운 스티어링 휠이 자리하고 있다. 6시 방향으로 두툼하게 내려오는 수직 레이아웃이 그 핵심으로, 하단에는 총 네 가지 드라이브 모드를 설정할 수 있는 버튼이 자리 잡고 있다. 3시, 9시 방향에는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차간 거리 설정, ADAS 등 운전자 보조 기능 버튼이 한데 모여있으며, 모든 버튼은 엄지손가락 만으로 조정할 수 있는 위치에 배치됐다.
기어 노브는 앞서 아이오닉5에서 처음 선보였던 ‘칼럼식 기어 셀렉터’를 채택하면서, 기존 센터패시아에서 스티어링 휠 뒤로 자리를 옮겼다. 이 역시 호불호가 나뉠 수 있겠지만, 무선 충전기를 비롯해 광활한 센터패시아의 수납공간을 본다면 마냥 불평할 수도 없을 테다.
<하입비스트>가 주행한 시승차는 3.5리터 GDI 가솔린 모델이다. 전체 라인업에서 가장 고성능 버전에 해당하는 이 차는 최고출력 300마력, 최대 토크 36.6kgf·m의 힘을 낸다. 하지만 페달을 깊숙이 밟아도 차가 빠르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주행모드를 스포츠로 바꾸자 발끝에 전해지는 토크감과 엔진 사운드는 강해졌지만, 역시나 ‘빠른 차’라는 느낌은 부족했다. 그 이유는 명료하다. 그랜저는 빠르게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랜저를 주행하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조용하다’는 것이다. 현대는 이번 그랜저의 차체 바닥은 물론 보닛 커버에도 흡음재를 잔뜩 집어넣었다. 프레임리스 도어 탓에 풍절음이 들이닥칠 법도 하지만, 속도계가 100km/h를 넘어서도 놀라울 만큼 고요함을 지킨다. 심지어 그랜저는 2열의 도어 커튼을 올릴 때 돌아가는 모터 소리 조차 조용하다. 현대에서 빠른 차를 사고 싶다면 N을 사면 된다. 하지만 그랜저는 운전하는 사람만큼 2열 탑승자가 중요한 차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현대는 이번 그랜저를 준비하며 정숙함과 편안함에 집중했고, 착실하게 그 목표를 달성했다.
그랜저의 휠베이스는 2895mm. 2열 레그룸은 키 170cm 중반대의 성인 남자가 앉더라도 다리 앞에 한 뼘 가까이 남을 만큼 여유롭다. 2열 좌석은 원터치 버튼을 통해 최대 8°까지 더 눕힐 수 있다. 패스트백 형태의 루프라인 탓에 헤드룸 공간이 좁아질 법하지만, 머리 위 공간을 파내어 이를 해결했다. 여기에 노면 정보를 미리 인지해 적합한 서스펜션 제어를 제공하는 ‘프리뷰 전자제어 서스펜션’은 요철을 지날 때마다 바닥 위 이불을 깐 듯한 승차감을 선사한다. 이전 세대에서 많은 불평을 샀던 JBL 스피커를 대체한 보스 오디오 사운드는 그랜저에 풍족함 더하는 요소 중 하나다.
그랜저 3.5 가솔린 엔진 모델의 가격은 3천9백66만 원부터 시작된다. 운영한 시승차의 가격은 캘리그래피 트림, 파노라마 선루프, 뒷좌석 VIP 패키지, HTRAC 등의 옵션을 더해 5천6백5만(개별소비세 3.5%)까지 치솟았다. 마냥 저렴한 가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같은 체급의 독일산 중형 세단과 비교하면 최소 2천만 원 이상 저렴하다.
오늘날 그랜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다. 차가 많이 팔리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잘 팔리는 차들이 그 모든 이유를 충족할 필요는 없다. 다만 현대는 사람들이 ‘모름지기 그랜저라면’ 하며 기대할 요소들을 충실하게 반영했고, 그 결과물에 ‘기함’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잘하는 일을 30년 넘는 세월동안 꾸준히 잘하는 것도 능력이다.
참고로 7세대 그랜저에는 출시 이전 무려 10만 명 넘는 사전 예약자가 몰렸다. 지금 주문해도 언제 받을지 알 수 없는 이 차에 수만 명 넘는 사람들이 저마다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현대차 전시장 앞에서 실망한 사람의 얼굴을 볼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