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니커의 제왕, ‘에어 포스 1’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출시 2년 만에 단종될 뻔했던 스니커의 지난 40년 역사.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스니커를 소개할 때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신발이 있다. 바로 나이키의 에어 포스 1이다. 지난 1982년에 처음 출시된 에어 포스 1은 나이키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신발 중 하나이자, 전 세계 대중문화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역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에어 포스 1의 영향력은 2022년에도 여전히 이어지는 중이다. 올해로 40번째 생일을 맞이한 에어 포스 1은 과연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신발이 됐을까?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유지되어온 디자인에는 어떤 에피소드가 깃들어 있을까? 스니커의 제왕 자리에 오른 에어 포스 1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유의미한 순간들을 모아 파헤쳐 봤다.
세계 최초의 ‘에어’ 스니커
지금이야 나이키 최신 스니커 중 ‘에어 솔’이 들어가는 않은 신발을 찾기 어렵지만, 40년 전만해도 세상에 ‘에어’라는 수식을 단 신발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이키가 10번째 생일을 맞던 1982년, 브루스 킬고어는 자신의 첫 번째 농구화 ‘에어 포스 1’를 세상에 선보인다. 킬고어는 에어 포스 1 샘플 모델을 대학교 농구 선수들에게 직접 가져가 피드백을 구했다고 한다. 당시 킬고어의 스케치 초안대로 생산된 샘플 모델들은 제조 과정에서 불량 문제에 시달렸는데, 이때 킬고어는 한 양말 판매업자로부터 “신발 틀을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킬고어는 자신의 에어 포스 1 디자인 스케치를 전달했고, 실제로 양말 판매업자는 5~6주 뒤 킬고어가 바라던 완벽한 밑창을 만들어 건넸다. 이후 킬고어는 스페인의 금형 업체를 소개받아 다양한 색깔의 미드솔과 컵솔을 만드는 방법을 터득했고 오늘날 에어 포스 1이 탄생하게 됐다.
에어 포스 1의 부활을 일으킨 도시, 볼티모어
에어 포스 1에게 가장 중요한 도시는 나이키 본사가 있는 오리건이 아닌 볼티모어다. 패션과는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이는, 미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볼티모어는 에어 포스 1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이키는 에어 포스 1이 큰 인기를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시 2년 만에 에어 포스 1을 단종시키기로 결정한다. 실제로 나이키는 1984년부터 1986년 사이 에어 포스 1 생산을 중단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볼티모어에 있던 스니커 편집숍 ‘다운타운 락커룸’, ‘신데렐라 슈즈’, ‘찰리 루도 스포츠’는 나이키 측에 ‘컬러 오브 더 먼스 클럽’ 컬러팩 생산을 발주한다. 이 세 가게 덕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에어 포스 1은 생산을 이어가게 된다. 이때 신데렐라 슈즈와 찰리 루도 스포츠의 각 바이버였던 폴 블링켄과 해롤드 루도가 기획한 컬러웨이 모델은 오늘날 ‘퀵스트라이크’라고 불리는 한정판 스니커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킬고어가 에어 포스 1이 출시된 지 5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인기를 끌고 있는지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는 나이키 인터뷰에서 “1987년 대만에 있는 신발 공장에 들린 적이 있다. 그때 사람들은 내게 에어 포스 1 이야기를 했고, 나는 ‘아직도 그 신발을 만들고 있는지 몰랐다’라고 말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때 대만의 공장 사람들은 “당연하다. 우리는 매일 에어 포스 1을 만들고 있다”라고 말했고, 킬고어는 그제서야 에어 포스 1의 인기를 실감했다고 한다.
‘업타운’, 힙합 아이콘으로의 부상
에어 포스 1의 부활을 이끈 도시가 볼티모어였다면 부흥기를 이끈 곳은 바로 뉴욕이다. 에어 포스 1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뉴욕 할렘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업타운’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에어 포스 1을 누구보다 빠르게 착용하며 그 인기를 견인한 장본인은 바로 ‘뉴욕의 왕’ 제이지다. 제이지는 1996년 자신의 첫 정규 앨범 <Reasonable Doubt> 수록곡 ‘Can I Live II’에서 “내 친구들은 전부 흰색 에어 포스 1과 검은색 총을 가지고 다니지”라고 직접 언급할 정도였다. 이때 에어 포스 1에 새롭게 깃든 문화가 바로 ‘웨어 원스 앤 기브 어웨이(wear-once-and-give-away)’다. 이는 흰색 에어 포스 1을 한 번만 신고 버리고 다시 새로운 신발을 신는 것을 뜻한다. 로커펠라 레코드의 공동 창립자 카림 ‘빅스’ 버크와 <컴플렉스>의 인터뷰에 따르면, 로커펠라 사무실에는 에어 포스 1이 언제나 20~30 켤레씩 쌓여있었고, 멤버들은 별도로 보관할 창고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에어 포스 1에 열광했다고 회고했다.
에어 포스 1의 근본이 ‘로우’가 아닌 ‘하이’인 이유
에어 포스 1은 농구화로서 처음 개발된 모델이다. 때문에 킬고어는 경기 도중 선수들의 발목이 뒤틀리는 것을 막기 위해 단단히 발목을 잡아줄 수 있는 스트랩을 탑재하고자 했고, 그에 최적화된 ‘하이’ 실루엣으로 신발을 디자인했다. 에어 포스 1이 출시되던 해 나이키는 당시 NBA의 최고 스타 6명을 한자리에 모아 광고를 찍었다. 활주로에서 비행기를 뒤로 한 채 에어 포스 1을 신고 있는 마이클 쿠퍼, 모제스 말론, 캘빈 넷, 자말 윌키스, 바비 존스, 마이클 톰슨의 광고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나이키 캠페인 중 하나다. 에어 포스 1은 마이클 조던의 에어 조던 1 보다 앞서 농구계에서 나이키의 이름을 알린 신발이기도 하다. 출시 1년 뒤 나이키는 농구장 밖에서도 신발을 간편히 신고 벗을 수 있는 ‘로우’ 모델을 출시했고, 나이키의 의도대로 에어 포스 1은 농구뿐만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발돋움 하게 된다.
오늘날 에어 포스 1 뒤의 ‘’07 LV8’는 무슨 뜻일까?


2007년 나이키는 에어 포스 1 출시 25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NBA 스타들을 호출한다. 이때 나이키는 르브론 제임스, 코비 브라이언트, 크리스 폴, 스티브 내쉬, 토니 파커, 폴 피어스, 숀 메리언, 라쉬드 월럿, 저메인 오닐, 아마레 스타더마이어까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한자리에 모아 흰색 에어 포스 1 로우를 신겼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에어 포스 1을 눈여겨 본 이들은 현재 출시되는 에어 포스 1 뒤에 ‘’07 LV8’이라는 수식이 붙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여기서 ‘07은 해당 모델이 2007년 새롭게 적용된 에어 포스 1의 디자인이라는 뜻으로, LV8는 ‘elevate’의 약자로 기존 모델보다 밑창이 약간 더 올라갔음을 의미한다.
협업을 위한 최고의 캔버스
2000년대 들어 나이키는 본격적으로 협업 에어 포스 1 협업 제작에 나선다. 나이키에 따르면, 에어 포스 1은 출시 이후 30년 동안 2천 개 이상의 변형 모델로 출시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것은 바로 지난 2017년 에어 포스 1 35주년을 기념해 전 세계 패션 아이콘들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AF-100’ 컬렉션이다. ‘AF-100’ 컬렉션에는 칸예 웨스트와 함께 굿뮤직을 세운 장본인이자 세계적인 스트리트웨어 디자이너 돈 C를 비롯해, 로커펠라 레코드의 공동 창립자 카림 ‘빅스’ 버크, 아크로님의 수장 에롤슨 휴, 오프 화이트의 창립자 버질 아블로,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트래비스 스콧이 참여해 총 5개의 새로운 에어 포스 1 화이트가 탄생했다.
40주년을 맞은 2022년이 되자 나이키는 럭셔리 브랜드 루이 비통과 손을 잡고 새로운 에어 포스 1 컬렉션을 선보였다. 해당 컬렉션은 버질 아블로의 유작으로도 큰 화제를 모았는데, 그중에서도 루이 비통 모노그램을 두른 브라운 컬러 모델은 소더비를 통해 2백 켤레 한정 수량으로 경매에 붙여졌다. 모든 신발은 한화 1억 원 넘는 가격을 기록했으며, US 5 사이즈 모델은 무려 한화 35만2천8백 달러, 한화 약 4억2천만 원에 최종 낙찰됐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스니커
‘스니커노믹스 2021 이어 인 리뷰’ 보고서에 따르면 나이키 에어 포스 1은 지난 2021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스니커로 기록됐다. 이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2022년 3월 기준으로 나이키 코리아 공식 웹사이트 내 에어 포스 1 로우 ‘화이트‘는 전부 품절된 상태다. 하지만 에어 포스 1은 한철 왔다가는 모델이 아니다. 유행과 무관하게 사랑받는 클래식한 디자인, 그를 뒷받침 하는 기술력, 그리고 전 세계 수많은 아티스트와의 협업은 지난 40년간 에어 포스 1을 스니커 시장 최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한 원동력이자, 앞으로의 40년 뒤를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