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IVERS: 이광호 & 1992 포르쉐 964 카레라 2
오늘날 한국 미술, 그리고 포르쉐의 역사에서 결단코 빠질 수 없는 두 이름.
‘DRIVERS’는 <하입비스트>와 함께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자동차에 품은 이들의 열정에 대해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간단합니다. ‘당신에게 자동차 문화는 어떤 존재이며, 당신은 왜 이 문화에 열정을 품게 되었는가?’ 우리는 여러 분야에 속한 자동차 마니아들을 만나 그들이 소유한 특별한 차들을 조명합니다. 그리고 자동차 문화를 어떻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건넵니다.
이광호 작가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뜨겁게 주목받고 있는 젊은 미술작가 중 한 명이다. 마치 거인의 손으로 뜨개질 한 듯한 형상의 가구들은 이광호 작가의 시그니처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는 중이다. 펜디, 디올, 보테가 베네타 등 다양한 브랜드와의 협업을 펼쳐온 그는 2019년 XXX의 정규 1집 <SECOND LANGUAGE>에 수록된 곡들의 이름을 제목삼아 완성한 10개의 오브제를 선보이며 국내 힙합 팬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광호에게는 작가로서 보내온 시간만큼 오래된 취미가 있다. 현재 그가 소유한 4대의 올드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중에서도 이광호 작가는 <하입비스트>에 소개할 차로 자신의 포르쉐 964 카레라 2를 골랐다. 964는 포르쉐를 상징하는 911의 세 번째 모델 코드명이다. 1988년부터 1994년까지 생산된 964는 포르쉐 뿐만 아니라 자동차 역사에서 지니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첫 제작 당시만 하더라도 포르쉐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라 사활을 걸고 964에 자신의 최첨단 기술을 집대성했는데, 이때 탑재된 3.6L 수평대향 6기통 엔진 공랭식 엔진은 911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물론 964의 아름다운 디자인 역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차를 드림카로 손꼽는 이유 중 하나다.
이광호 작가는 자신이 소유한 자동차 중 유일하게 964 카레라 2만을 차고가 아닌 작업실에 두고 있다. 매일같이 형태의 아름다움과 재료가 지닌 물성에 대해 고민하는 이광호 작가의 작업실 한편을 차지한 차가 포르쉐 964라는 것은 상징적이다. <하입비스트>는 직접 이광호 작가의 작업실로 향해 그가 여태까지 소유했던 올드카에 대해,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좋은 차’는 어떤 차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가져오신 차에 대해 간략한 소개 한번 부탁드립니다.
1992년 출시된 포르쉐 911 카레라 2, 코드명은 964입니다.
처음 이 차는 어떻게 사게 되셨나요?
저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미술 작업을 해오다 보니까, 차가 지닌 있는 성능보다는 형태와 디테일을 보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10년째 올드카라는 취미에 빠져 있게 됐죠. 올드카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아마도 포르쉐 964는 한 번쯤 꼭 사고 싶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워낙 아이코닉 한 차니까요.
911은 포르쉐를 상징하는 모델인 동시에, 8세대에 걸친 장수 모델이기도 하죠. 그중에서도 하필 3세대 모델을 고르신 이유가 궁금해요.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모양 때문인 것 같아요. 2세대 모델도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관리가 쉽지 않겠더라고요. 그래서 정비성이 좀 더 나은 964를 구입했어요. 4세대 모델인 993도 참 예쁘지만, 제게는 964의 생김새가 더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앞뒤 세대와 비교한다면 964는 포르쉐의 상징인 ‘개구리 디자인’이 정점을 찍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964가 지닌 많은 디테일 중에서도 헤드램프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뒤 범퍼, 테일램프도 정말 예쁘고요. 하나하나 따지면 아름다운 요소가 참 많은 차예요.
지금 총 4대의 차를 소유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현재 차고에 있는 자동차들도 소개 한번 부탁드립니다.
구매 순으로 소개하자면 2002 메르세데스-벤츠 G500(W463), 1992 포르쉐 911 카레라 2(964), 2002 메르세데스-벤츠 SL500(R129) F1 에디션, 1987 BMW 535i(E28) 에디션 5가 되겠네요. 이 차들을 사게 된 것 역시 모양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아요. 차를 구입하기에 앞서 늘 형태적으로 흥미로운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봤던 것 같아요.
G 바겐은 아시다시피 구형 모델이 신형보다 더 각지고 박시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매력적이었어요. SL500은 유독 뒷모습이 아름다운 차에요. 카브리올레 모델이라 지붕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개방감이 너무 좋죠. SL500은 우연치 않게 F1 에디션으로 구입했는데, 나중에 부품 찾다가 이 차가 미국에서만 20대 한정으로 출시된 모델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한국에도 한대 밖에 없다고 알고 있어요. E28 같은 경우는 BMW 클래식 모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E30이랑 많이 닮았죠. 하지만 제 눈에 ‘샤크 노우즈’라고 불리는 E28의 전면 디자인이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최근에는 E28을 가장 자주 타고 있습니다.
유독 독일차들이 많은데 그 이유가 있을까요?
독일차를 골라서 산 건 아니고, 모으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독일 브랜드들은 오래전부터 다방면으로 기술적인 면에서 앞서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형태를 잘 뽑아낼 수 있었지 않을까 싶어요.
평소 자동차 취향이 어떤 편이신지 궁금해요.
SUV, 쿠페, 왜건 다 상관 없어요. 다만 취향이라고 한다면 순정 모델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처음에 출고했을 때 모습 그 자체를 좋아해요. 어떤 커스텀도 거치지 않은 순정차는 디자이너들의 의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조금은 수수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수십 년 전 디자이너들의 상상력과 기술력을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 그래서 저는 커스텀을 하더라도 그 차가 처음 출시되던 그 상태 그대로 복원하려고 노력해요.
여태까지 소유하셨던 다른 차들도 궁금해요.
첫 차는 2002 볼보 XC 70이었어요. 그다음으로 1987 BMW E30, 1994 볼보 940GL를 구매했어요. 2002 재규어 다임러 CJ(X308) 슈퍼차지드 V8, 2004 랜드로버 디스커버리2 TD5도 소유했던 적이 있어요. 이렇게 놓고 보니 제가 1990년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서 나온 차들의 형태를 좋아하는 것 같네요.
다른 964와 달리, 작가님이 가지고 계신 964에만 있는 특별한 요소가 있을까요?
사실 이 차도 순정상태로 복원하려고 애썼어요. 포인트를 주기보다 첫 상태로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거든요. 외장 컬러도 처음 출고되던 당시의 색상으로 복원했어요. ‘슬레이트 그레이’라는 이름의 컬러인데, 스티븐 맥퀸이 타던 911 S가 같은 색깔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이 차를 타면서 가장 ‘좋다’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면요?
일단 964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차중에서 유일한 공랭식 모델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자연흡기 엔진이 내는 소리도 참 듣기 좋고요. 80km/h가 넘어가면 엔진을 식히려고 자동으로 뒷면 플랩이 열리는데 그런 소소한 장면들을 볼 때마다 재미있죠.
차를 아주 오랫동안 좋아하셨다는 게 느껴져요. 어린 시절 드림카는 어떤 차였나요?
학창 시절에 영화를 참 좋아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외국 영화 보면 멋있는 차가 정말 많이 나오잖아요. 영화관 스크린, 영화 잡지에 나오는 차들을 보면서 동경심이 생겼죠. 그 시절 가장 좋아해던 건 볼보 왜건이었어요. 그중에서도 740 왜건이 마음에 들었는데, 자를 대고 직선을 그려 넣은 듯한 외장 실루엣이랑 미니멀한 실내 인테리어가 좋았어요. 아직 740을 구입하진 못했고, 세단 모델인 940GL은 소유했던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꼭 가지고 싶은 오늘날의 드림카가 있다면요?
요즘 제일 관심 있게 보는 차는 페라리의 575M 마라넬로인데요. 이 차는 볼 때마다 감탄스러워요. 물론 마라넬로 이전에도 페라리는 아름다운 차들을 정말 많이 만들어 왔지만 제가 실제로 소유하고 운용하기에는 거리감이 있는 것 같아요. 람보르기니의 디아블로도 너무 좋죠. 아우디 콰트로도 좋아하고요.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라인이 참 특별하구나’하는 생각을 들게 해요.
아무래도 미술 작업을 하시다 보니 디자인에 대한 시각도 남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자동차 디자인의 요소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 차의 기능에 맞게 설계가 된 디자인이 아닐까 싶어요. 포르쉐 911은 생긴 것부터 정말 잘 달릴 것처럼 생겼잖아요.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잘 달릴 것 같다’라고 느껴지게 하는 요소들은 주행성능을 높이기 위해서 설계된 것들이고요. 차의 목적이 디자인에서부터 느껴지고 실제 기능까지 하는, 직관적인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소유 이력을 듣고 보니 유독 올드카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신차보다 올드카를 선호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요즘 차들은 사람처럼 인상이 있어요. 화난 인상, 무뚝뚝한 인상, 귀여운 인상 등등 차마다 표정이 있죠. 반면 옛날 차들은 특정한 인상을 풍긴다는 느낌이 적어요. 디자인도 결국 기능에서 비롯됐다는 느낌이 강하죠. 자동차도 결국 기계라는 점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런 점이 제게는 더 매력적이에요. 요즘 차에서는 볼 수 없는, 차 곳곳에 숨겨진 디테일들도 너무 흥미롭고요.
소유하고 계신 네 자동차 브랜드 전부 전기화 전략을 발표했어요. 내연기관차를 좋아하시는 입장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자동차 시장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해요.
당연한 추세라고 생각해요. 저도 얼마 안 가서 전기차를 탈 수밖에 없을 거라고도 생각하고요. 하지만 길에 주유소가 있는 한 최대한 내연기관차를 즐기고 싶요. 최근에도 <하입비스트>에서 옛날 미니를 전기차로 리스토어 해주는 서비스가 나왔다는 소식을 읽었어요. 그런 절충안들이 필요하겠죠. 성능을 떠나서 디자인적인 이유로 옛날 차를 좋아하는 저 같은 사람들도 있을테니까요. 우리가 좋아하는 옛날 차의 디자인을 유지하면서도 전기차로 탈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마지막은 ‘DRIVERS’의 공통 질문입니다. 이광호가 생각하는 ‘좋은 차’는 어떤 차인가요?
뻔한 답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결국 좋은 차는 ‘내가 좋아하는 차’가 아닐까 싶어요. 사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오래된 차를 방법은 신차를 사는 것과 완전히 다르거든요. 신차는 전시장에 가서 계약을 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끝이지만, 올드카는 내가 손수 매물을 찾아야 하고, 때로는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도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차를 만나러 가는 과정 속에서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가 생겨나니까 애정이 쌓일 수밖에 없죠. 그게 새 차가 됐건, 올드카가 됐건 내가 그 차를 좋아하고 손에 넣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과정에서 분명 재미있는 일들이 생길 겁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차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