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p Visits: 샘플라스 도산
편집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편집숍, 샘플라스의 세 번째 터전.
Shop Visits: 샘플라스 도산
편집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편집숍, 샘플라스의 세 번째 터전.
온라인 쇼핑에 대한 제약이 그 어느 때보다 낮아진 지금, 터치 하나면 이역만리의 제품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세심하게 큐레이팅 된 공간에서 옷을 직접 입어보고 구매하는 경험은 온라인에선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는 편집숍 샘플라스가 궁극적으로 소통을 지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터넷에는 없는 브랜드와 디자이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품을 직접 입어보며 브랜드의 철학을 몸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
하지만 샘플라스가 해당 목표를 실현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지난 2012년, 온라인 편집숍으로 시작한 샘플라스가 서교동의 작지만, 알찬 공간에 첫 번째 매장을 차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7년. 그리고 일 년이 지나 샘플라스는 합정의 어느 볕 좋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제 압구정 도산 공원 인근에 세 번째 둥지를 틀었다.
샘플라스 매장에 들어서면 604서비스와 에이시넥틱스를 비롯한 여러 국내 브랜드가 고객을 먼저 반긴다. 여기엔 신진 브랜드를 조명하겠다는 홍광일 대표의 의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스테인리스 스틸 벽면과 대비되는 반투명 유리블록으로 구성된 데스크, 그리고 플랜테리어가 눈에 들어온다. 다양한 장르의 신진 브랜드를 주로 취급하는 샘플라스의 정체성과도 제법 잘 어울리는 구성이다.
이어서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오면 최근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은 카르넷 아카이브와 엘리엇 에밀, 그리고 또 다른 신진 브랜드인 뎃 블레브 센트의 의류를 볼 수 있다. 해당 아이템들의 공통점이라면 로고나 컬러보다는 실루엣으로 승부를 본다는 것이다. 매장 모퉁이를 돌면 엑슬림과 라스벳 등 스트리트 패션의 세계에 더 가까운 아이템이 걸려있다.
그리고 방문객이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것은 벽 끝에 배치된 홍광일 대표의 사무 공간. 쇼룸과 해당 공간을 분리하는 것은 컴퓨터 모니터를 겨우 가릴 정도의 높이인 스테인리스 스틸 가림막이 전부다. 이는 소통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그의 철학이 반영된 설계다. <하입비스트> 또한 마침 데스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홍광일 대표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시작된 자연스러운 대화. 먼저 샘플라스가 압구정에 온 이유부터 물었다.
샘플라스 도산 스토어가 문을 열었다. 합정에서 압구정으로 자리를 옮긴 이유가 뭔가?
단순하다. 압구정은 내가 자란 동네이자 패션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금의환향까진 아니더라도, ‘동의환향’ 정도는 되는 것 같다(웃음).
매장 디자인에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을 꼽자면?
초안에선 스테인리스 스틸과 콘크리트의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컸다. 하지만 두 소재가 내는 차가운 느낌을 덜어내기 위해 빛이 투과되는 유리블록과 플랜테리어 디테일을 추가했다. 이 근사한 인테리어엔 IDL 디자인의 편기윤 대표님의 공이 크다.
매장이 복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간 구획은 어떻게 했나?
1층엔 지금 샘플라스의 가장 상징적인 브랜드와 더불어 새롭게 추가된 브랜드 제품이 진열되어 있다. 한편, 2층은 그러데이션 느낌으로 브랜드를 배치했다. 계단을 타고 올라오면 엘리엇 에밀과 카르넷 아카이브처럼 엣지있는 블랙 컬러 의류가 먼저 보이고, 이후 스카이 하이 팜 워크웨어나 라스벳 같은 익살스러운 디자인의 스트리트 무드의 브랜드가 눈에 들어오게끔.
평범한 디자인의 옷이 많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자극적인 디자인의 제품이 눈에 먼저 들어오기 마련이다. 샘플라스의 셀렉션은 얼핏 봤을 땐 마라탕 전문점 같아도, 슴슴한 평양냉면 같은 옷도 많다. 모두 캐주얼한 착장에 포인트 주기에 좋은 제품이다.
압구정엔 이미 많은 편집숍이 들어와 있고, 최근 많은 스트리트웨어 브랜드도 이곳에 매장을 열었다. 어떤 점에서 압구정은 격전지인 셈인데, 경쟁에 대한 우려는 없었나?
아무래도 주변에 비슷한 브랜드를 취급하는 편집숍이 많다 보니 상도덕 측면에선 걱정이 됐다. 나까지 압구정으로 오는 게 맞겠느냐는 그런 고민. 하지만 경쟁 등 상업적인 측면에 대한 우려는 없었다.
이유는?
자신 있으니까(웃음). 지금까지 단순히 인기 있다거나 잘 팔린다는 이유만으로 브랜드를 입점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가 잘 됐을 뿐이다. 예컨대 10년 전쯤엔 <섹스 앤 더 시티>의 의상감독인 패트리샤 필드가 만든 ‘VOGUE’ 스냅백을 우여곡절 끝에 국내 최초로 유통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드래곤이 그 모자를 쓰고 나오더라. 덕분에 그 제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이후에도 그런 식으로 과감하게 바잉한 브랜드가 예상 이상으로 잘 되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운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모두 취향의 힘을 증명한 사례 같다. 이처럼 편집숍은 대표의 직감에 따라 ‘셀렉’을 하면 잘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 샘플라스만의 차별점을 꼽자면?
일단 같은 마틴 로즈여도 여기엔 내 취향에 맞는 과감한 실루엣의 제품이 다른 숍보다 더 많다. 그런데 가장 확실한 차별점은 소통 방식 같다. 샘플라스의 소통 방식은 양방향이다. 일반 고객이 추천하는 브랜드를 바잉하는 경우도 많았고, 단골손님이 직원으로 함께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직원과 내 사무 공간을 별도로 분리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손님이든, 스타일리스트든 방문객과 최대한 직접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이건 샘플라스가 첫 번째 매장부터, 지금의 세 번째 매장으로 오기까지 쭉 지키고 있는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
국내 브랜드의 비중도 유독 높은 것 같다.
이건 내 오랜 고민에서 출발했다. 학창 시절 학교가 끝나면 이 근방의 편집숍을 도는 게 취미였다. 그런데 당시엔 어디를 가든 한국 브랜드는 찾기 힘들었다. 의아했다. 한국 브랜드가 없는 한국 편집숍이라니. 그런 기억 때문인지 지금 난 일종의 의무감처럼 한국 브랜드를 중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젠 다른 숍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긍정적인 현상이다.
요즘 주목하고 있는 브랜드가 있나?
최근까지 캠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한 아킬레스 이온 가브리엘이 새롭게 전개하는 개인 브랜드를 주시하고 있다. 본래 풋웨어 디자이너였던 그는 이제 풀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아직 장담은 못 하지만, 조만간 여기서 만나보게 될 수도 있을 거다.
그럼, 브랜드를 입점시키는 기준은 어떻게 되나?
옷의 관점에서는 내가 입고 싶거나, 내 연인에게 입히고 싶은 디자인의 제품을 선보이는 브랜드를 주로 택한다. 하지만 난 옷만큼이나 사람을 중시한다. 좋은 브랜드는 성장하려는 의지, 그리고 비전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의외의 답변이다. 흔히 말하는 ‘감도’ 같은 얘기를 예상했는데.
옷이나 브랜드의 무드는 필수 조건이다. 만약 살짝 부족하다면 개선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옷과 달리, 사람은 안 바뀐다. 겉으로 보이는 건 옷뿐일지 몰라도, 이 일도 결국 소통과 신뢰로 빚어지는 엄연한 ‘비즈니스’다.
그런 좋은 브랜드가 모인 숍은 무조건 좋은 편집숍이 될 수 있는 건가?
난 아니라고 본다. 단순히 좋은 브랜드가 모인 공간은 그저 옷이 걸린 공간에 불과하다. 좋은 편집숍은 패션 브랜드에 적절한 인큐베이팅 역할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함께 성장할 수 있게끔.
인큐베이팅?
넓게는 판매 데이터 등에 기반한 가격 책정이나 브랜드 전략 수립에 대한 조언을 주고, 좁게는 브랜드가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한다. 연예인에게 입점 브랜드의 제품을 입히거나, 일반 소비자의 제품 착용 사진을 공유하는 그런 일. 그렇게 함께 ‘으쌰으쌰’ 하면서 브랜드가 성장하는 걸 보는 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다.
소비자의 관점에서 좋은 편집숍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일차원적으로는 옷을 싸게 파는 편집숍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브랜드에 관해 배우고, 문화를 함께 향유하는 경험도 확실히 값지다. 결국 문화 소비를 하는 건 문화를 함께 향유하기 위한 것이니까. 그런 점에서 편집숍은 자기만의 관점을 소비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샘플라스는 어떤 편집숍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하나?
그저 구매와 판매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편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