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IVERS: 허재영 & 1987 메르세데스-벤츠 560 SL
“저한테 자동차는 ‘움직이는 가방’에 가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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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IVERS’는 <하입비스트>와 함께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자동차에 품은 이들의 열정에 대해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간단합니다. ‘당신에게 자동차 문화는 어떤 존재이며, 당신은 왜 이 문화에 열정을 품게 되었는가?’ 우리는 여러 분야에 속한 자동차 마니아들을 만나 그들이 소유한 특별한 차들을 조명합니다. 그리고 자동차 문화를 어떻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건넵니다.
허재영은 지갑 속 명함은 여러 개다. 그는 자동차 문화의 허브로 자리매김한 피치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스테레오 바이널즈의 창립자이며, 장 줄리앙과 함께 패션 브랜드 ‘누누’를 운영하고 있고 있다.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운전대를 잡아온 그는 스스로 ‘차를 잘 알지 못한다’고 소개했지만, 차를 향한 남다른 시선과 애정을 품고 있다.
현재 그의 차고에 있는 자동차는 총 3대다. 그중에서도 허재영 디렉터가 ‘DRIVERS’ 시리즈를 위해 준비한 차는 바로 메르세데스-벤츠의 560 SL이다. 1980년대 메르세데스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560 SL은 특유의 각진 디자인, 탈착식 루프, 5600cc 엔진에서 뿜어 나오는 넉넉한 출력과 말캉한 승차감으로 전 세계 수많은 자동차 마니아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됐다.
서울에서 패션, 영국에서 그래픽을 전공한 그는 자동차를 두고 교통수단보다는 ‘움직이는 가방’에 가깝다고 말했다. 패션 아이템으로서 차를 향유하는 그가 하필 560 SL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아가 성능보다는 특정 차만이 가지는 이미지에 집중하는 그가 말하는 ‘좋은 차’는 어떤 차일까? 장마가 물러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허재영 디렉터와 그의 560 SL을 만나고 왔다.
오늘 함께 자리해 준 자동차 소개 먼저 부탁드립니다.
1987년형으로 출시된 메르세데스-벤츠의 560 SL입니다. 코드네임은 R107이에요.
560 SL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구하기 힘든 차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 어떻게 구입하게 되셨나요?
올해 초에 구매했어요. 사실 이 차가 한국에 있다는 건 작년 말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제가 바이앤빌리브라고 하는 컬렉터 플랫폼을 운영 중인데, 같이 일하는 저희 대표가 자동차를 환자 수준으로 좋아하거든요. 예전 사무실 근처에 세차장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560 SL이 두 대가 세워져 있었어요. 하나는 흰색, 하나는 검은색이었는데 저희 대표가 무작정 찾아가서 혹시나 팔 생각이 있으시면 연락 달라고 명함을 건넸죠죠.
그리고 몇 달 지나서 차주분 아내께서 전화를 주셨어요(웃음). 그 전화받을 때 마침 제가 옆에 있었거든요. “그거 뭐야?”해서 곧장 둘이서 찾아갔어요. 전 차주분이 카센터랑 세차장을 같이 운영하시는 매카닉이셔서 상태가 너무 좋더라고요. 하드톱도 보관하고 계셨고요. 대표가 “이 차는 안사면 손해”라고 단정 짓길래 그 자리에서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메르세데스는 1백 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상징적인 모델들도 많죠. 개인적으로 SL 외에도 좋아하는 모델이 있을까요?
저는 2000년부터 운전을 해서인지, 그 전후로 차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요. 개인적으로는 처음 운전대를 잡고 차에 빠지기 시작하던 그 무렵의 벤츠를 좋아합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존하는 느낌이 흥미롭고, 무엇보다 디자인이 예쁘잖아요.
그중에서도 하필 SL을 구입해야겠다고 결정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이 차를 장난감, 또는 하나의 오브제로 봤을 때 할 수 있는 게 많아 보였어요. 개체 수부터 유니크하다는 장점이 있고, 하드톱과 소프트톱을 둘 다 씌울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어요. 이 차는 지붕을 올렸을 때랑 벗겼을 때가 유독 달라요. 지붕이 있을 때는 되게 클래식한데, 벗기면 완전 힙합이거든요. 560 SL은 유럽형이랑 미국형이 범퍼가 다른데 이 차는 유럽형이라서 좀 더 예쁘게 나온 것 같아요. 당시에 미국에서는 법적으로 범퍼가 크게 나와야 했고 동그란 헤드램프가 양쪽에 두 개씩 있어야 했거든요. 그런 디테일들이 재미있죠.
비슷한 시기에 고민했던 다른 차도 있었나요?
하이퍼카를 고민했었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하이퍼카의 세계에도 끝이 없잖아요. 저는 피치스를 통해서 다양한 하이퍼카를 경험할 기회가 있는데, SL은 지금 아니면 탈 기회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제가 직접 몰기에 하이퍼카는 이미지적으로도 부담스럽기도 하더라고요. 반대로 SL은 모든 사람들이 깍두기처럼 보는 것 같아요. 때마침 함께 누누를 전개하는 장 줄리앙과 아트카 프로젝트를 해볼 생각도 있었고요. 여러모로 지금이 아니면 이 차를 살 기회는 다시는 안 온다는 생각으로 구매했습니다.
첫차부터 지금까지 소유했던 차들도 궁금해요.
처음 몰았던 차는 어머니께 물려받았던 1998년식 르노 삼성 SM520이에요. 말도 안 되게 튜닝해서 타고 다녔어요(웃음). 2002년도에는 폭스바겐 뉴비틀을 신차로 샀어요. 당시 통계를 보면 한국에 뉴비틀이 2백 대도 안 팔렸대요. 뉴비틀 타고 서울 시내에 나가면 사람들이 다 세워보라고 하던 이상하고 재미있는 시기였어요. 그 차를 제가 영국으로 유학 가기까지 탔어요.
2006년부터 2016년까지는 차를 안 탔어요. 런던은 차가 필요 없는 도시더라고요. 한국에 들어와서는 “그래도 유럽에서 왔으니까 왜건을 타야겠다”싶더라고요(웃음). 그렇게 산 차가 메르세데스-벤츠 C220 에스테이트에요. 그 다음으로는 2018년에 포르쉐 991.2 4S를 샀고, 2년 뒤에는 BMW X7 M50i 다크 섀도우 리미티드 에디션을 구입했고요. SL을 포함해서 지금 이렇게 세 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리스트를 쭉 듣고 보니까 독일차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세뇌당한 거 아닐까요?(웃음) 첫 차가 준 독일차의 이미지가 좋았던 것도 있는 것 같아요. 2002년식 폭스바겐 뉴비틀이 당시 돈으로 3천2백만 원 정도 했었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에 비슷한 가격으로 살 수 있었 차는 BMW 3시리즈, 메르세데스-벤츠 C 쿠페가 있었어요. 정말로 차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폭스바겐 골프 GTI를 탔고요. 뉴비틀은 인기 모델은 아니었지만 어떤 모임에 가도 쓱 끼워주는 분위기였어요. 차를 사면 꽃이 담긴 작은 꽃병을 같이 줬는데 그런 점이 기억에 남네요.
지금 가지고 계신 차들은 모두 디자인도 성격도 완전히 다른데. 어떤 차를 가장 자주 타시나요?
아무래도 911을 가장 많이 타죠. 주차하기도 편하고 데일리카로는 최고니까. 오히려 X7은 너무 커서 가족끼리 다닐 때 주로 타요. X7도 G 바겐이나 레인지로버 같은 경쟁 모델들이 있잖아요. 하지만 지금 제 나이나 라이프스타일을 따졌을 때 X7이 가장 잘 맞겠더라고요. 무엇보다 딸이 좋아했어요.
오래된 엔진이다 보니 환경 규제 때문에 운행이 까다롭다고 들었어요. 이 부분에서 불편하신 점도 있을 것 같은데.
운행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다만 1990년대 이전 출시된 차들에는 배출가스 5등급이 적용돼서, 하절기에는 서울 사대문 안으로 운영이 불가능해요. 겨울에는 서울 시내에서 주행이 아예 허락되지 않고요. 그래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전기차로 바꿀 생각도 있어요. 실제로 해외에서는 560 SL을 전기차로 커스텀 한 경우도 많고요. 아니면 현행 엔진을 얹을 수도 있어요. 이 차가 엔진이 워낙 커서 전기모터나 요즘 나오는 엔진들도 다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평소 자동차 취향은 어떤 편이신가요?
옷 취향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저는 스포츠웨어도 좋아하고, 컨템퍼러리, 클래식웨어도 좋아하거든요. 특정 브랜드나 스타일을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고, 그냥 차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다만 차는 옷이랑 다르게 실제로 운용을 해야 하고 덩치도 크잖아요. 시간이 지나도 안정적이고 특유의 멋이 옅어지지 않는 차를 사자는 주의에요. 그런 측면에서 911이나 오래된 클래식 벤츠 같은 차들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저 개인적으로 로드스터는 자기 취향에 맞춰서 타는 게 좋고, SUV는 최신형을 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차에만 적용된 특별한 커스텀 요소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오히려 신차로 돌아가야 될 만큼 안 좋은 오디오가 있어요. 중간에 누가 CD 플레이어로 바꿔놨는데 덕분에 오래된 CD로 음악을 듣는 재미는 있어요. 최근에 창고 정리하면서 예전에 샀던 닥터 드레, 니고 앨범 CD를 찾았는데 자주 듣고 있습니다. 그것 외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오히려 차 대부분이 순정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는 것? 만일 아트카로 바꾼다면 차 옆에 장 줄리앙이 그린 닥스훈트를 새겨보면 어떨까 싶어요. 실제로 옆에서 보면 닥스훈트처럼 생기기도 했고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는 차도 하나의 패션 아이템이라고 생각해요.”
빈티지카를 타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시계나 가방의 오리지널 피스를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 같아요. 저는 패션 디자이너 중에는 라프 시몬스를 좋아하는데, 오래전 아카이브들을 가지고 있으면 뿌듯하잖아요. 차도 마찬가지예요. 출시되던 당시에 차를 구입해서 시간이 오래 지났을 수도 있고, 빈티지로 살 수도 있지만 소유하게 되는 목적은 동일한 것 같아요.
반대로 분명한 단점도 있을 것 같아요.
단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보관이죠. 그것 외에는 잔고장도 없는 편이라 크게 속 썩일 일은 없었어요. 저는 옷도 그렇고 차도 그렇고 세세하게 신경 쓰면서 사용하는 편은 못돼요. 새 옷 입고 나가서 그날 케첩 흘리는 스타일인데 그런 습관들이 차를 탈 때도 묻어나는 것 같아요. 차든 옷이든 내가 즐기면서 타고 입어야 하는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유하는 의미가 옅어지는 것 같아요.
차를 몰기 전, 어린 시절 꿈꿨던 드림카가 있었을다면 알려주세요.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포르쉐였죠. 그때도 차를 좋아하긴 했지만 제 꿈에 나올 만큼 동경했던 차는 911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저를 비롯해서 <나쁜 녀석들>을 보고 자란 세대라면 누구나 911을 드림카로 꿈꿨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럼 앞으로 꼭 가지고 싶은 드림카가 있다면?
요즘 그 드림카를 찾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웃음). 일단 오랫동안 생각이 나는 건 타르가인 것 같아요. 일단 디자인이 너무 예쁘니까. 개인적으로 992가 991 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타르가 만큼은 992가 뛰어난 것 같아요. 지금은 대기 기간이 너무 길어서 992.2 타르가가 나오면 그때 진지하게 한번 고민해 보려고요.
빈티지 카가 아닌 현재 출시되는 차들 중에서 눈여겨보신 모델도 있다면요?
편안한 차도 한번 타보고 싶기는 해요. 좀 더 핸디한 사이즈의 현대 N 모델이 그렇고요. 최근 새로 발표했던 아이오닉 6도 실제로 어떨지 궁금해요. 반대로 가자면 GLS 마이바흐도 타보고 싶어요. 하이퍼카 중에서 고르자면 페라리 SF90. 하이브리드 모델이라서 그나마 동네 분들께 민폐 끼치지 않고 탈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
여전히 자동차 업계에서는 전기화가 화두죠. 시간이 더 흐르면 지금 타고 있는 차는 더 힘들어 질텐데, 빠르게 전기화가 진행되는 자동차 시장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궁금해요.
이 모든 걸 단순히 패션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애플 워치랑 롤렉스의 차이가 아닐까요? 저는 그런 것 같아요. 교통수단으로서는 전기차가 낫고, 취향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기존의 내연기관차나 클래식카들이 낫죠.
이건 피치스에서도 많이 하는 이야기인데 전기차는 사실 만드는 방식이 우리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미니카랑 비슷하잖아요. 각 회사에서 만든 똑같은 플랫폼 위에 디자인을 얹는 식이니까. 타미야의 미니카처럼 차 밑에는 배터리가 있고, 그 위에 카울은 자기 맘대로 바꿀 수 있는 시대가 올 텐데, 그때는 오히려 사람들의 취향이 더 존중받고 실제로 반영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시각에서 보면 전기화는 너무 흥미롭죠. 결국에는 차의 디자인을 애플워치에 페이스처럼를 바꿀 수 있는 시대가 올 테니까요.
마지막은 ‘DRIVERS’의 공통 질문입니다. 허재영이 생각하는 ‘좋은 차’는 어떤 차인가요?
본인이랑 잘 어울리는 차 아닐까요? 그때의 나이와 스타일에 잘 맞는 차. 저는 차도 하나의 패션 아이템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저한테 자동차는 교통수단보다 ‘움직이는 가방’에 가까워요. 오늘은 이 신발을 신어야지, 저 가방을 들어야겠다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어요. 요즘에는 시계 가격이 웬만한 차보다도 비싸기도하고요. 비싸고 유명한 브랜드의 모델들도 물론 훌륭하지만, 자신의 스타일에 어울리는 차를 찾아보세요. 그게 차를 더 재미있게 오래 즐길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