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 쿠라야 인터뷰: 무표정한 소녀들을 그려내는 작가

“무표정은 오히려 감정을 담기 위한 그릇이다.”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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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커다란 눈과 갸냘픈 신체를 지닌 소녀들, 그에 비해 놀라울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된 일상 속 거리 풍경,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멈춰 있는 듯한 시간. 에미 쿠라야의 회화는 한 캔버스 속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이 겹쳐지며, 기묘하면서도 매혹적인 조화를 만들어낸다.

에미 쿠라야는 무라카미 타카시가 설립한 아트 소사이어티 ‘카이카이키키’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일본의 젊은 작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열다섯 즈음의 소녀들로, 어떤 인물은 희미한 외로움 속에 서 있고, 또 다른 인물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과 조금은 어색한 자세로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낯설지 않은 풍경 속에 놓인 인물들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이 느껴지고, 보는 이로 하여금 문득 스스로의 기억에 천천히 다가서게 만든다. 무표정한 소녀들의 표정을 통해 우리는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감정을 마주하게 되고, 정교하게 묘사된 익숙한 배경을 통해 지나온 시간 속 어느 추억이 다시금 선명해진다. 

그렇게 에미 쿠라야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를 통해 말없이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익숙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그 풍경은 보는 이의 내면을 조용히 비추는 거울이 되어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감정의 흔적과 천천히 눈을 맞추게 만든다. 이에 <하입비스트>는 한국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선보이는 에미 쿠라야를 페로탕 서울에서 만났다. 그의 섬세한 내면의 세계가 담긴 인터뷰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미 쿠라야 인터뷰: 무표정한 소녀들을 그려내는 작가

Happy Bunny, 2025 ©︎2025 Emi Kuraya/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일본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작가 에미 쿠라야다. 회화와 드로잉 작업을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다.

2021년, 첫 개인전은 팬데믹으로 한국에 오지 못했다. 이번에는 직접 오프닝을 함께 했는데 소감이 어떤가?

맞다. 이번이 한국에 처음 방문한 거다. 첫 개인전 당시 아쉬움이 크게 남았었는데, 두 번째 개인전은 현장에서 직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생각보다 일본과 가까워서 놀랐고, 한국에서 만난 분들도 다정해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번 개인전 <해피 버니>의 타이틀이 인상 깊다. 어떤 의미인가?

‘해피 버니’는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소녀가 들고 있는 토끼 인형의 이름이다. 한껏 멋을 낸 소녀가 등장하는 작품도 있어서 전시 타이틀을 좀 더 팝한 느낌으로 가져가고 싶었는데, 결국 이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에미 쿠라야 인터뷰: 무표정한 소녀들을 그려내는 작가

Untitled, 2024 ©︎2024 Emi Kuraya/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그간 캐릭터에 이름을 붙이지 않던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해피 버니’만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이유가 있나?

사실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저 처음 그렸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른 인상이 ‘해피 버니’였다. 다른 동물들도 그릴 때 이름이 바로 떠오르기도 하는데 아닌 경우도 더러 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기는지는 아직 나도 잘 모르겠다. 

작품을 보면 인물은 만화적인 반면, 배경은 사진처럼 사실적이다. 회화와 사진을 혼합한 의도가 뭔가?

명확한 의도라기보다, 감정과 감각이 자연스럽게 분화된 결과다. 인물에는 내가 전달하고 싶은 감정이 담겨 있고, 배경에는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풍경이 담겨 있다. 큰 눈의 인물들은 어릴 적 읽었던 소녀 만화에서 영향받은 작화 방식인데, 그 방식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과 잘 맞다. 반면 배경은 내가 걷던 거리나 풍경을 토대로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을 정밀하게 그려낸다. 그런 혼합이 내 작업의 중요한 결이라고 느낀다. 회화이기에 가능한 표현이기도 하고. 

에미 쿠라야 인터뷰: 무표정한 소녀들을 그려내는 작가

Black Ribbon, 2025 ©︎2025 Emi Kuraya/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지뢰계 스타일의 소녀들이 종종 등장한다.

지뢰계는 말 그대로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청소년들을 상징한다. 10대의 감정은 굉장히 에너지가 강하지 않나. 그런 점이 내 작업에서 다루는 감정과 잘 맞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의 스타일이나 분위기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이다. 

작품 속 인물 대부분이 무표정이다. 감정이 배제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 이유가 있나?

무표정은 다양한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여백 같은 거다. 웃는 얼굴이나 우는 얼굴처럼 기호화된 표정을 그리면,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인물에게 투영하기가 어렵다. 무표정은 오히려 감정을 담기 위한 그릇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하코네 여행을 그린 드로잉에서는 캐릭터가 유일하게 웃고 있다.

그 그림은 친구와 하코네에 여행 갔던 날을 추억하며 그린 거라, 그날 느꼈던 내 감정을 오롯이 담고 싶었다. 평소에는 인물의 감정에 내가 몰입하는 편이라면, 그 그림은 내가 경험한 감정 그대로를 표현한 예외적인 작품이다. 

에미 쿠라야 인터뷰: 무표정한 소녀들을 그려내는 작가

Dragonflies and a Circular Pond, 2025 ©︎2025 Emi Kuraya/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Dragonflies and a Circular Pond>는 네모난 캔버스가 아닌 타원형 캔버스를 사용했다.

그 작품의 모티브가 된 연못이 실제로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다. 그래서 직관적으로 차용한 것도 있지만, 익숙한 사각 프레임보다 변형 캔버스를 사용하면 더 독특한 균형으로 그림을 구성할 수 있다. 그 점이 재미있어서 가끔 사용하곤 한다. 

드로잉과 유화 작업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기준이 있나?

드로잉은 순간의 영감을 빠르게 포착할 수 있어서 자주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후 그 드로잉을 유화로 확장할지에 대해서는 내가 얼마나 그 이미지에 몰입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유화는 오랜 시간 집중해야 하는 작업이니까, 애정을 갖고 끝까지 그릴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실제로 작가가 직접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이 작품의 배경이 된다. 신주쿠나 이케부쿠로가 자주 등장하는데 좋아하는 장소인가?

신주쿠와 이케부쿠로는 학생 때 고민이 많을 때 자주 걷던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배경으로 그리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요코하마의 미나토미라이 지역을 좋아한다. 이 곳은 일본이 국제항을 열었던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 해서, 흥미로운 장소들이 많다. 

에미 쿠라야 인터뷰: 무표정한 소녀들을 그려내는 작가

Untitled, 2024 ©︎2024 Emi Kuraya/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에미 쿠라야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길 바라나?

내 작품은 대부분 내 주변 풍경이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에게 “저희 동네에도 이런 곳이 있었어요”, “이 작품을 보고 어릴 적 기억이 났어요” 등 공감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나만의 내밀한 경험이 여러 사람들에게 공감되거나 투영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고, 이에 큰 보람을 느낀다.

마지막 질문이다.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나는 예술이 우리 외부의 가치와 마주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으며, 앞으로도 계속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 내 작품 속에 묘사된 세계가 보는 이의 마음 속 풍경과 연결되는 순간이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에미 쿠라야 인터뷰: 무표정한 소녀들을 그려내는 작가

Claire Dorn/Perrotin ©︎ Emi Kuraya/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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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mi Kuraya/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Courtesy Perro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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