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ovy Everywhere’는 ‘그루비룸’이 작곡한 노래에 등장하는 시그니처 사운드다. 실제로 수없이 많은 곡을 만들어낸 그루비룸은 어디에든 존재했다. 휘민과 함께 유능한 K-Pop 프로듀서 팀으로 성장한 그루비룸은 짧은 시간 안에 다수의 히트곡을 기록했고, 순식간에 유명인 반열에 올랐다.
허울을 쫓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하며, 잘 팔리는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규정은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됐다. 그런 그에게는 용기가 필요했다. 규정은 ‘그루비룸’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이름 ‘IÖN’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음악은 단순한 멜로디의 나열이 아니라, 소년 만화를 떠올리게 할 만큼 그가 겪었던 감정과 불안, 그리고 용기의 여정을 담고 있다.
<하입비스트>는 그런 IÖN과 마주했다. 그는 더 이상 무색무취의 존재로 머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첫걸음을 통해 그가 사랑하는 것들과 전하고 싶은 메시지들이 비로소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의 첫 EP <CÖURAGE>는 IÖN 그 자체다.
재킷과 팬츠, 신발은 모두 릭 오웬스, 후디는 카키스, 티셔츠는 타일즈, 액세서리는 톰 우드, 선글라스는 버버리.
그루비룸 규정이 일렉트로닉 아티스트 IÖN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네요.
오랫동안 정말 많은 고민을 했고,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는 과정이 참 좋았어요. ‘그루비룸’의 멤버로서 주로 팀 활동을 해왔는데, 솔로 아티스트로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드디어 첫 앨범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 정말 감격스럽고, 뿌듯합니다.
IÖN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었나요?
이름을 짓는 데 많은 고민을 했어요. 원래 ‘그루비팍’이라는 이름으로 DJ 활동도 했고, 외국 친구들에게 그렇게 소개하기도 했는데, 사실 저는 그 이름을 스스로 선택한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프로젝트를 위해 새로운 이름을 고민하면서 ‘진짜 나 다운게 뭘까’라고 생각했죠. 단순하고 심플한 이름을 원했고, 제가 좋아하는 과학 용어에서 영감을 받아 ‘아이온(ion)’을 선택하게 됐어요. 하지만 ‘ion’이라는 단어가 너무 흔하다 보니, 고유성을 위해 ‘Ö’ 기호를 사용하게 됐어요.
휘민도 ‘릴 모시핏’으로 활동 중인데, 그의 영향도 있었나요?
그럼요. 원래는 솔로 프로젝트를 생각해 본 적 없었어요. 3년 전, 휘민이가 릴 모시핏 앨범을 준비할 때, 제가 많이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휘민이가 저에게 조언해준 말이 저에게는 큰 동기부여가 됐어요.
그 한마디가 어떤 말이었나요?
“뭐라도 해라.”
IÖN으로 활동을 선언한 후, 실제 본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아직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변화는 느끼지 못했어요. 다만, 이번 프로젝트를 단순히 앨범 하나 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길게 보고 있어요. DJ로서도 앞으로 보여줄 것이 많고, 점차적으로 제 음악 세계를 확장해 나갈 계획이에요. 그래서 아직은 천천히 계획을 세워가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자신감과 확신이 더 생긴 것 같아요. 음악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됐죠.
이전의 ‘규정’과 IÖN으로서의 마음가짐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졌어요.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IÖN이라는 캐릭터에 100% 몰입했습니다. 단순히 음악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제 라이프스타일과 철학까지 모두 이 프로젝트에 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음악은 물론이고, 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삶의 방식에도 많은 고민을 했어요. 그 결과, 이 앨범을 통해 제가 전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됐고, 앞으로도 이런 철학적 고민을 계속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과거에 본인을 ‘무색무취의 사람’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지금의 IÖN은 어떤 색깔과 향을 가진 사람인가요?
과거 저는 제가 좋아하는 취향도 분명히 있지만, 스스로를 소개하는 데 취약했어요. 다양한 것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특정한 것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 많은 것들 중에서 내가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정해가고 있어요. 예를 들어, ‘나는 산미가 있는 커피보다 쓰고 고소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점점 더 색깔이 뚜렷해지는 것 같아요.
IÖN의 음악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하고 싶나요?
아름다운 음악. 저는 아름다운 선율과 감성적인 가사를 담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습니다.
이번 EP 앨범 <CÖURAGE>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특히 앨범명에 담긴 의미가 궁금합니다.
앨범명 <CÖURAGE>는 용기에서 시작됐어요. 저는 항상 걱정이 많았고,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고민 때문에 시작조차 못 했던 적이 많았어요. 그런 불안감과 걱정들이 저를 자주 멈추게 했죠. 그런데 이번 앨범은 그런 걱정과 불안을 넘어서, 결심을 하고 용기를 내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이 앨범은 저의 내면의 여정을 담고 싶었고, 그 근본에 ‘용기’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앨범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용기가 필요하다’는 진정성 있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이 앨범을 통해 저와 같은 용기를 얻길 바래요.
앨범 제목과 아티스트 이름에 Ö라는 알파벳을 사용하셨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요?
사실 Ö가 스웨덴어에서 비롯된 건 몰랐어요(웃음). ‘ion’이라는 단어가 너무 흔하다 보니 피하려고 했고, 예전에 좋아했던 그룹 잭 Ü에서 U 위에 점 두 개를 찍는 로고를 보고 영감을 받았어요. 그리고 과학적으로도 원자핵과 전자 궤도를 떠올리게 되어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앨범 내 트랙 이름이 ‘Savior’, ‘Fight For Nothing’, ‘Dear I’ 등이 인상적이에요. 이는 IÖN의 심경을 반영한 메시지인가요?
네, 곡을 만들 때 메시지를 많이 생각했어요. ‘Dear I’는 제가 20대 때 불안했던 시절을 돌아보며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곡이에요. ‘Savior’는 앨범의 메시지를 포괄하는 첫 번째 트랙입니다.
첫 데뷔 EP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을 것 같아요. 준비 과정은 어땠나요?
이번에도 빨리 만들었어요 (웃음). 사실 2024년 3월에 모든 곡의 스케치를 끝냈고, 1차 편곡도 마무리했어요. 시간이 오래 걸린 부분은 가사 작업과 믹싱이었어요.
제일 빨리 완성된 곡은 얼마 정도 걸렸나요?
가장 빠르게 작업된 곡은 2시간? 저는 작업실에 가기 전에 집에서 음성 메모로 멜로디 스케치를 미리 해두고, 작업실에서는 빠르게 완성해가는 스타일이예요. 이렇게 준비해두면 하루에 한 곡씩 완성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많은 아티스트의 음악 디렉팅을 맡아왔잖아요. 작업할 때 특히 집중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여태까지 그루비룸으로서 작업할 때는 메시지적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하고, ‘어떤 사운드를 빨리 보여줄까’, ‘어떻게 트렌디하게 보여질까’에 많은 신경을 썼다면, 이번에는 제 이야기를 담고,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에 더 많이 신경을 쓴 것 같아요.
작업 중 큰 기대를 품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반응이 좋지 않았던 경험이 있나요? 그리고 만약 실패했을 때의 기분은 어떤가요?
너무 많죠. 당연히 업으로 하다 보면 제가 원하지 않는, 즉 별로 흥미가 없는 작업도 있을 거고, 진짜 돈 때문에 해야 되는 일도 있었고요. 전에는 제 예상과 다른 피드백이 오면 아쉽고 좌절감이 마음속에 깊게 남아있었는데, 이제는 제 손을 떠나면 아예 신경을 안 쓰려고 하고 있어요. 한 번씩 찾아 듣기도 하지만 사실 많이 안 들어요. 왜냐하면 만드는 과정에서 너무 많이 듣기 때문에, 발매가 되면 나면 잘 안 듣게 되더라고요.
20살 때 올린 카카오톡 보이스톡 알림음 편곡 영상부터 모두의 마블 BGM 편곡까지, 본인의 과거 작업을 봤어요. 당시 어떤 일화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어릴 때부터 ‘관종’기가 있어서 빠르게 피드백을 받는 걸 좋아했어요. (웃음). 저는 ADHD도 있어서 긴 호흡의 작업을 못 하거든요. 무조건 그날 만들고 바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뭐라도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한 작업이었고, 정말 그냥 재밌어서 한 거였어요.
이미 많은 음악을 규정으로 선보였고, 앞으로 IÖN으로서도 활동할 텐데, 음악적 아이디어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전에는 영감을 얻는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음악은 당연히 음악에서 오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즘 느끼는 건, 새로운 경험에서 오는 것 같아요. 여행이 될 수도 있고 전시가 될 수도 있죠. 주말마다 안 해봤던 걸 하려고 많이 찾아다녀요. 예전에는 귀찮아서 공연도 많이 안 봤는데, 요즘은 보고 싶으면 바로 예매해놓고 전시도 많이 보러 다니고, 최근에는 미디어 아트에 흥미가 가요.
주로 어떤 클럽에서 음악을 듣거나 직접 공연하시나요?
일반적으로 클럽하면 남녀가 만나고 신나게 술을 마시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방향은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클럽이에요. 보통 테크노 장르가 그러한데, 음악에 온전히 몸을 맡기다 보면 음악이 집중되어서 크게 들리고, 몸을 감싼다는 느낌이 들어요. 반복되고 긴 호흡을 가진 음악들에 빠져들다보면, 작게 날아다니던 소리가 치고 올라오고 곡의 기승전결을 따라가게 되거든요. 저는 이 빠져드는 느낌을 ‘트랜스 모드’라고 불러요. 어두컴컴한 테크노 클럽을 가면 모든 사람이 50cm 정도 간격을 두고 즐기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번 EP를 클럽에서 직접 틀어보셨나요? 반응은 어땠나요?
그루비룸 이름으로 제 노래를 하나씩 섞어 플레이한 적은 있지만 IÖN으로서 본격적인 공연은 아직 한 번도 안 했어요.
IÖN은 어떤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싶나요?
제가 어떤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싶다기 보단,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 음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이 와야 적절한 주인을 만난다고 생각해요. 음악이 적절한 군중을 만나서 빛을 발할 수 있는데, 원하지 않는 곳에 가서 공연하는 것은 저도 힘 빠지는 일이에요. 지금은 이 장르의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 곳이 필요하다고 느껴요. 제 음악 스타일과 잘 맞는 페스티벌이나 공연할 기회가 있다면 그곳에서 플레이하는 게 목표예요.
한국은 일렉트로니카의 불모지라고 하셨고, 본인의 음악이 전자음악 장르의 입문 음악이 되고 싶다고 하셨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일렉트로니카, 전자음악의 범위는 엄청 넓은데, 제가 말하는 건 댄스 음악이예요.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움직이게 만들어야 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당연히 파티도 중요하고 오프라인에서의 사람들과의 호흡도 너무 중요해요. 한국은 훌륭한 DJ도 많이 있지만 제게 자극이 되는 레퍼런스가 딱히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오래 들을 수 있을 법한 멜로디를 선택했어요. 처음 이 장르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이 앨범을 준비했습니다.
IÖN이 바라본 최고의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는 누구인가요?
너무 많죠, 너무 많은데.
세 명만 꼽자면.
세 명보다 더 해도 되나요? (웃음) 굳이 따지자면 ‘스크릴렉스’와 ‘디플로’를 가장 오랫동안 롤모델로 생각했어요. 어떤 아티스트를 최고로 꼽냐에 따라 너무 다양한 아티스트가 있어요. 커머셜하고 성공한 DJ로는 ‘데이비드 게타’, ‘켈빈 해리스’를 포함해 ‘마틴 게릭스’도 있고, 전자음악 신에 한 획을 그었다고 생각하는 ‘에릭 프리즈’와 ‘테일 오브 어스’를 비롯해 요즘에는 ‘프레드 어게인’도 있고요.
그런 많은 아티스트들이 IÖN에게 영향을 줬나요?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죠. 어느 한 아티스트를 꼽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앨범을 들어보면 느껴지실 거예요.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는데, 프로그래시브 하우스, 멜로디 테크노, 하드 테크노 등 많은 걸 함축했어요.
인스타그램에서 “음악 작업이 마감에 맞춰 해내야 하는 일이 되어 흥미를 잃었다”라고 하셨는데, 빠른 한국 사회에서 매너리즘을 겪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그리고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매너리즘을 겪은 후, 제 철학은 ‘낙관적 허무주의’로 바뀌었어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설령 아쉬운 선택이라 하더라도 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매너리즘을 겪을 때, 잠잘 때 눈을 감는 것이 죽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허무한 삶 속에서 제가 찾은 해답은 재미있는 일을 하자 였어요.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목적이 생기면 힘들어지더라고요. 돈을 벌거나 관심을 받는 것이 목표가 되면,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 ‘왜 이 일을 해야 하지?’라는 고민이 생기니까요. 그래서 재미가 사라지거나 슬럼프에 빠지면,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이유를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그루비룸으로 활동할 때와 IÖN으로서 활동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그루비룸은 팀으로서 서로의 취향을 녹여내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협업과 양보가 필요해요. 그래서 서로의 취향이 섞이면서도 새로운 음악이 나오기도 하죠. 반면에 IÖN으로 활동할 때는 온전히 제가 이끌어가야 하는 프로젝트죠. 제 취향과 생각을 100%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나 정규 앨범 발매 계획은 있나요?
네, 이미 다음 앨범을 준비 중이에요 (웃음). 이번 앨범이 첫걸음이었고, 앞으로도 꾸준히 제 음악적 색깔을 더 다듬고, 발전시키면서 활동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다음 앨범에서도 제가 가진 철학과 음악적 취향을 계속 담아내려고 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IÖN에게 ‘용기’란 어떤 의미인가요?
저에게 용기는 이번 앨범의 핵심 메시지이자,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이예요. 용기가 있었기에, 힘들었던 시절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다시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음악을 다시 즐길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앨범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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