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의 국내 플래그십 매장인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에 위치한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2008년 에르메스 재단 설립 이래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제정 등을 통해 한국을 비롯한 동시대 현대 미술의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자체 기획 전시와 프로젝트를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2020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선보이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새로운 프로젝트는 프랑스 출신의 아티스트 시프리앙 가이야르의 개인전. 이번 개인전은 기이했던 올해의 상황을 돌아보는 개인의 회고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마치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분열되는 듯한 초현실적인 위기를 경험하면서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다. 이 기이한 경험은 마치 미래의 폐허를 미리 보는 듯한 당혹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광대한 시간과 공간의 범주 속에서 동시대를 통찰하는 시프리앙 가이야르의 작품 세계는 주목할 만하다.

이번 전시는 시프리앙 가이야르가 올해 2월 초 국경 봉쇄 직전 마지막 로스앤젤레스 여행에서 이중 노출로 촬영한 폴라로이드 사진을 주축으로, 작가의 핵심적인 초기작 ‘호수 아치(2007)’와 ‘황금과 거울의 도시(2009)’를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초기의 주요 작업물들과 최신작의 만남은 마치 괄호 모양처럼 그의 작품 세계의 시작과 끝을 포괄하며 그 전체를 상상하게 한다.

‘호수 아치(2007)’는 홈비디오처럼 친구들과의 여름 물놀이를 소형 핸디캠으로 촬영한 것이다. 이 비디오는 사운드조차 없는 단 1분 39초 길이의 초단편으로 제작되었지만, 인상적인 배경과 등장인물, 그리고 파격적인 사건의 요소를 완벽히 갖춰 한 편의 그리스 비극을 보는 듯한 충격을 전달한다.

호수 아치와 더불어 전시되는 ‘황금과 거울의 도시(2009)’는 작가의 초기 대표작으로, 향후 전개될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 대한 단서를 미리 제시하는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다. 멕시코의 유명 휴양지 칸쿤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미국의 10대 단체 관광객들이 상의를 탈의하거나 비키니를 입은 채 등장하는 첫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피라미드 호텔의 외곽 공원에서 독한 술을 자랑삼아 폭음하는데, 지역의 역사나 문화에 무관심한 이들이 폭음하는 술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야의 이미지가 라벨로 붙어 있는 ‘아즈텍의 영혼’이라는 이름의 테킬라다. 이들이 만취를 통해 맛보는 무아지경은 역사의 망각이나 소멸의 과정과 언뜻 닮아 있다.

올해 초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한 ‘정신을 제외한 모든 것(2020)’은 팬데믹의 시작으로 도시에서 일상용품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는 와중에도 주류 소비가 폭증하면서 슈퍼마켓이나 주유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맥주 냉장고를 피사체로 삼은 연작이다. 더불어 인적이 점점 뜸해지는 도시 전역에 왕성하게 분포한 식물들의 삶을 겹쳐 다루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야기한 재앙이 실제 위협으로 다가오는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프리앙 가이야르는 균형과 상호 관계를 유지하는 세계를 제안하며, 가장 혼란스럽고 파괴적인 상황에서도 끊임없는 재조정을 통해 균형을 추구할 수 있는 장소를 모색한다. 이번 전시는 2021년 1월 17일까지 이어지며, 장소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프리앙 가이야르 개인전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7 지하 1층 아뜰리에 에르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