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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시선을 끄는 그림이 있다. 수학처럼 명확한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익숙한 인물이나 풍경, 혹은 특정 대상이 그려진 그림들이 대개 그렇다. 유행도 여기에 한몫한다. 한창 단색화가 유행하던 시기에는 어디든 온통 단색화 일색이라 익숙해질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또 최근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화풍을 살펴보면, 손맛 나는 투박한 질감의 인물화가 자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NFT의 열기가 더해져 사람이나 캐릭터가 두드러지는 작품이 많은 컬렉터들에게 환영받고 있는 분위기다.

작가 275C의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일종의 유행 특색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이나 풍경은 고사하고 그나마 익숙했던 대상을 키우거나 변형시켜 오히려 낯설게 느끼게 한다. 그 흔한 미키 마우스 같은 캐릭터도 없고, 손맛이 넘쳐흐르는 현란한 붓질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어디에 내놓아도 눈에 띈다. 낭만과 여유, 그리고 유머가 가득한 삶과 작품을 지향하는 275C를 만나 그가 가지고 있는 275C만의 작품 공식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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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명이 제법 인상적인데, 275C라는 이름에 특별한 뜻이 있나요?

특별한 뜻은 없어요. 학창 시절에 가상의 브랜드를 만드는 디자인 과제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한글보다는 영어가 세련됐다고 생각해서 대부분 영어로 된 이름을 짓는 분위기였어요. 그 와중에 저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이름을 짓고 싶어서 숫자를 활용해봤죠. 제 이름이 이재호인데, 이름과 가장 발음이 비슷한 숫자를 찾다 보니 275라는 조합이 나왔어요.

혹시 야구를 좋아했었나요?

마침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만들어진 275C라는 이름으로 작가 활동을 하는 도중에 잠깐 일본에서 지냈던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 일본 친구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야구선수 이치로의 팬이냐는 뉘앙스로요. 당시에는 이치로라는 야구 선수가 있는지도 몰랐고, 엄연히 따지면 이치로가 아니라 이칠오(275)라고 몇 번이나 설명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후에는 귀찮아서 그냥 이치로 팬이라서 275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기도 했어요.

275C의 첫 커리어는 무엇인가요?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공부하는 와중에도 디자인 스튜디오나 회사에 취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졸업 후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개인 작업을 병행했어요. 주로 잡지나 패션 브랜드의 의뢰를 받아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았던 것 같아요. 당시 저의 작업 방식이 ‘콜라주’였는데, 기존의 이미지들을 비정형적으로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과 결과를 사람들이 좋게 봐줬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 막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일본으로 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위에서 언급했듯, 저는 콜라주라는 방식으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특히 온라인상에 떠도는 수많은 이미지를 리서치하고 스크랩하여 이것들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는데, 무한한 리소스에 반해 그 결과물을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의외로 한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기존 이미지를 활용하는 작업이다 보니 저작권이라는 이슈도 매번 신경 써야 했고요. 표현하고 싶은 작업은 많았는데 방식이 주는 한계가 있다보니 조금 쉬면서 그 대안을 찾고싶어 떠났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겸사겸사 여행도 할 목적으로 일본으로 가게 됐는데, 그 생활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학원을 등록해 계속 머물렀고, 이후에는 운 좋게 현지의 회사를 다니며 조금 더 지낼 수 있게 되었어요.

일본 생활을 통해 얻은 점이 있다면요?

이미지를 패턴으로 작업하는 방식에 흥미가 생겼었어요. 패턴처럼 반복되는 이미지가 재밌기도 하고, 아무래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에 활용도가 높고 더 큰 규모의 작업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패턴화된 작업을 이용해 요요진(YOYO-ZINE)이라는 매거진도 혼자 만들어보고, 그러면서 계속 패턴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작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걸 느꼈어요. 그 무렵 한국으로 돌아와 패턴 작업을 활용한 저의 첫 개인전을 열게 되었죠. 2012년에 진행했던 ‘SWiT’이라는 전시였는데, 심슨이나 마리오, 스머프처럼 당시 제가 좋아하던 만화나 게임 캐릭터와 카모플라주 패턴을 결합한 이미지를 만들고, 이것을 다시 소파 오브제에 랩핑하는 형태의 작품들을 소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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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개인전을 하게 되었나요?

제가 2010년부터 작업을 시작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그때는 다양한 유가 잡지가 발행되던 시절이라 잡지 커버나 삽화 작업을 많이 했었어요. 덕분에 유니클로, 캘빈클라인 같은 패션 브랜드나 BMW 기업과도 협업할 기회도 있었고요. 개인 작업이 많이 노출되지 않았지만, 제 색깔이 많이 드러난 상업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이 대중에게 노출되면 조금씩 인지도가 쌓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우연히 전시 제안을 받게 되었는데, 갤러리를 찾아보니 집에서 가깝기도 해서 오래 망설이지 않고 결정했었어요.

본인을 비주얼 토털 아티스트라고 소개하던데요.

주제도 주제지만 다양한 소재와 방법으로 작업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첫 전시에서는 소파를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이후 전시들에서는 조명이나 가방을 만들기도 하고, 펠트 소재를 활용한 와펜이나 폐박스를 모아서 작품의 재료로 활용하기도 했어요. 그때부터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만든다는 표현을 쓰고 있어요. 최근에는 평면 작업 위주로 선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작품을 하는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 목표예요.

작업 스타일이 굉장히 다양한 것 같아요. 지금의 스타일은 어떻게 구축하게 된 건가요?

과거의 작품은 주로 컴퓨터 그래픽을 출력해 여러 가지 형태에 적용하거나, 기존 이미지를 활용한 콜라주 작업이었다면, 2017년에 진행했던 전시 의 출품작부터는 제가 직접 작화하는 방식으로 작업의 방향을 잡았어요. 그때부터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이미지를 평면 회화에 담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했고, 2년 전 열렸던 전시의 출품작들의 분위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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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C의 그림이 가진 특징이 있다면?

저는 시각적으로 오는 자극에 민감한 편이에요. 예를 들어, 서점에서 예쁜 책을 발견하면 내용과 상관없이 그 이미지가 좋아서 책을 구매하기도 해요. 작품도 비슷한 맥락으로 접근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제 작품에는 상대적으로 감정이 배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흔히 회화 작품이라고 하면 인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초상화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풍경화를 떠올리기 쉽잖아요. 물론, 이런 감정의 정수를 담는 추상 작품도 대표적인 회화의 얼굴이죠. 하지만 현재 제 작품에는 이런 종류의 그림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아요. 제가 영감을 받는 것은 사람의 감정보다는 현재 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이미지들이 그 중심에 있고, 그것들을 제가 좋아하는 소재를 통해 위트 있게 전달하는 것이 지금은 가장 즐겁더라고요.

작품의 의미보다 이미지에 집중한다는 뜻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오히려 작품의 주제와 의미를 너무 고민하다 보니 한 가지 카테고리에 귀속시키는 게 어려워 여러 가지 주제로 연작을 하고 있어요. ‘ANDERSEN’이나 ‘GIFT SHOP’이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네요. 넓게 보면 삶의 조화로운 균형을 의미하는 ‘S.O.B(Sense of Balance)’가 제 작품의 가장 상위 개념을 차지하는 주제인 것 같기도 해요. 이런 주제를 그림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살짝 위트 있게 비틀어서 비유하거나 희화하는 편이에요.

275C의 작품에서 작가의 시그너처라고 할 수 있는게 있을까요?

무겁거나 우울한 주제를 가볍고 유쾌한 표현으로 풀어내는 방식.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같은 뉘앙스처럼요.

“낭만과 여유, 그리고 유머 감각이 충만한 삶을 지향하는 것. 이것들과 어울리는 삶과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해요.”

작업할 때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나름의 작업 철학이 있어요. 꾸준하기보다는 충동적인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 노력하기보다는 쉽게 잘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 낭만과 여유, 그리고 유머 감각이 충만한 삶을 지향하는 것. 그리고 이것들과 어울리는 삶과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해요.

275가 지향하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명확하게 어떤 작품이라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제가 시각적인 자극에 이끌려 이미지를 소비하고 소장하듯, 이미지만으로도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그림을 만들고 싶어요. 작품의 의미만큼 그 작품이 가진 인상도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러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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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스크래치가 조금 있는 것 같은데요. 의도한 부분인가요?

제가 천 캔버스가 아니라 나무 판넬을 직접 만들어서 작업하는데, 작업하는 과정에서 판넬에 균열이 생기기도 하고 임의로 상처를 내기도 합니다. 결국에는 둘 다 의도한 것이 맞아요. 임의로 작품을 숙성시킨다는 의미의 에이징(aging) 과정이라고 표현합니다.

작품에 에이징을 하는 이유가 뭔가요?

작품을 위한 자료를 리서치 할 때 자연스러운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이미지를 스크랩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런 질감까지도 작품에 담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오랜 기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생기는 얼룩이나 상처를 임의로 표현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나름의 방식으로 이런 스토리텔링을 하고 싶어서 제가 작업에 종종 활용하는 과정입니다.

그럼 매번 만들 때마다 다른 작품이 나오는 게 아닌가요?

네, 맞아요. 제 작품에 에디션이 붙는 경우가 많았는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에디션을 붙였던 적이 있어요. 보통 작품에 에디션을 적용할 때는 동일한 작품을 복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저는 개념이 조금 달랐어요. 전체적인 도상은 동일하지만 그 안의 미묘한 질감과 디테일이 모두 다른, 결국 에디션이지만 각각의 작품이 유일한 성질을 가진 원화라는 개념으로 접근했던 것 같아요. 에디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공들여 그림을 그리다 보면 해당 작품이 가진 도상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하나만 그리기 아까울 때도 꽤 많아요. 그래서 일부러 에디션을 붙인 작품도 있어요. 작품이 팔려 제 수중에 없더라도 나중에 두고두고 보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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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집중하고 있는 주제가 있나요?

제 작업 중에 ‘GIFT SHOP’이라는 타이틀로 전개되는 연작이 있어요. 일본에서 머물던 시절에 매일같이 찾아다니던 곳곳의 빈티지숍에 진열된 제품과 그 속의 일러스트레이션이나 그래픽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1900년대에 탄생한 미국과 서양권 기업의 제품 및 광고, 그리고 브랜드 아이덴티티 등을 모티프로 하는 회화 작품을 작업했는데 이를 모아서 전시를 준비했어요.

상업 일러스트레이션을 조명한 이유가 있나요?

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고민해 봤어요. 해당 시기에 발표된 명화가 될 수도 있고,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사건이나 인물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바로 상업 일러스트레이션이나 커머셜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마트나 편의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제품이나 광고의 이미지가 그 시대의 풍경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준비하고 있는 전시는 어떤 전시 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상업 일러스트레이션의 황금기는 1900년대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미국이나 서양권 기업에서 탄생한 수많은 상업 일러스트레이션과 그래픽 디자인은 지금 봐도 놀라운 정도로 감각적이고 세련된 이미지가 많아요. 이런 이미지들을 지극히 회화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한 작품들로 구성한 전시가 바로 입니다. ‘GOLDEN’이라는 주제는 황금기(Golden Age)라는 단어에서 착안했어요. 우리가 사는 인생의 황금기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는 이야기도 이번 전시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고요. 전시는 성수동에 있는 CDA갤러리에서 열립니다.

그렇다면 275C의 황금기는 언제였나요?

누구나 살면서 본인의 황금기를 꿈꾼다고 생각해요. 황금기라는 표현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평온한 마음과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무탈하게 지내는 일상이야말로 요즘 같은 시국에는 이 또한 황금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상업 일러스트레이션의 황금기라는 가시적인 주제 안에는 모두의 황금기를 응원하는 저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전시 이후의 예정된 활동이 또 있나요?

5월에 또 다른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어서 한참 작업 중에 있어요. 그리고 중간중간 아트페어에도 참여할 것 같아요. 여전히 커머셜 작업도 진행하고 있지만, 올해는 전시나 페어 등으로도 작품이 많이 소개될 수 있도록 균형을 맞춰 볼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하입비스트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몸과 마음과 기분의 건강을 위하여! 그리고 제 작업도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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