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하이 인터뷰: “에픽하이는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그룹이었으면 해요”
믹스테이프 ‘PUMP’로 다시 한 번 뭉친 세 신사들.

에픽하이 인터뷰: “에픽하이는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그룹이었으면 해요”
믹스테이프 ‘PUMP’로 다시 한 번 뭉친 세 신사들.
최근 믹스테이프 <PUMP>를 발매했어요. 해당 음반으로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나요?
타블로: 솔직히 말해서 이제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할 단계는 아닌 거 같아요. 그냥 들려주려고 낸 거죠.
미쓰라: 지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하는 거죠.
<PUMP>가 에픽하이의 첫 번째 믹스테이프더라고요. 믹스테이프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나요?
타블로: 저는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저희가 이탈리아 요리를 전문적으로 하는 요리사라고 쳐요. 그럼 항상 파스타를 만들다가 한 번 짜파게티를 끓여주는 기분으로 믹스테이프를 만든 거죠. “우리는 가까운 사이니까, 오늘은 재료가 많이 들어간 요리 말고 라면을 한 그릇 끓여줄게”하는 느낌으로요. 그렇다고 정성이 덜 들어간 건 아니고, 오히려 묘한 정이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지 특히 저희의 오랜 팬들이 이번 음반을 좋아하더라고요.
라면은 빨리 완성되는 요리잖아요. 그럼 <PUMP>의 작업 기간도 다른 앨범에 비해 짧은 편이었을까요?
타블로: 애매해요. 해외 일정이 많아서 틈틈이 시간 날 때 작업했거든요. 사실 녹음 자체는 3일 안에 다 끝냈어요.
투컷: 또 저희가 활동 기간이 오래됐다 보니, 기존에 작업하던 음반에서 들고 온 곡도 있어요.
제목인 ‘PUMP’는 무슨 뜻인가요?
미쓰라: 다시 한번 뛰어오른다는 느낌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걸 다시 터트리는 시간? 사실 전 글자 모양만 보고 “오케이” 했어요. 전 폰트만 보거든요 (웃음).
타블로: 이 친구가 에픽하이 굿즈를 디자인하는데, 티셔츠나 모자에 쓰기 좋은 제목으로 정해달라길래 짧게 갔죠. 솔직히 아무 생각 없이 짓긴 했어요. 스니커 솔의 펌프를 보고 이름을 가져온 다음에 심장 박동을 뜻한다고 의미 부여를 했죠. 아무 이유가 없으면 에픽하이스럽지 않으니까요. 여담으로 ‘meow’, ‘ouch’도 후보군에 있었어요.
<Map of the Human Soul>처럼 그룹 활동 초기엔 복잡하거나 심오한 앨범명이 유독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엔 앨범명이 확실히 더 단순해진 느낌이에요. 작년에 낸 EP 앨범 <Strawberry>처럼요.
타블로: 뭐든지 한 가지 일을 길게 하다 보면 더 단순해지는 방향으로 변하는 거 같아요. 작업 방식도 달라진 게 예전엔 트랙에 악기를 비롯한 요소를 넣는 과정이 제일 길었다면, 이젠 빼는 과정이 더 길어요.
이번 믹스테이프와 음악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전 앨범을 꼽자면요?
투컷: 2집 <High Society>의 감성이 좀 있는 거 같아요.
타블로: <High Society>가 어떻게 보면 저희에게 첫 앨범보다도 더 중요한 앨범이에요. 첫 앨범까지만 해도 비트를 저희가 만들지 않았거든요. 그때도 만들 줄은 알았지만, 누군가에게 들려주기엔 두렵고 부끄러운 단계였죠. 그러다 이후 제가 다이나믹 듀오의 ‘이력서’를 작곡하게 됐고, 투컷도 갑자기 저를 찾아와서 직접 곡을 만들고 있다고 들려줬어요. 알고 보니 저희 둘 다 프로듀싱을 따로 연마하고 있었던 거죠. 그때 투컷이 처음 들려준 비트가 ‘Lesson 2 (The Sunset)’가 됐고, 앨범의 다른 수록곡도 셀프 프로듀싱으로 만들게 됐어요. 그래서 그 앨범은 잘 몰랐던 만큼 정말 자유로워요. 어설퍼서 더 매력적이죠. 그리고 이번 앨범에도 그런 날 것의 맛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날 것의 느낌은 의도한 건가요?
타블로: 굳이 따지자면 그래요. 피처링까지 합치면 지금 저작권 협회에 등록된 저희 곡이 500곡은 될 거예요. 그만큼 새로운 시도도 정말 많이 해봤죠. 그 때문인지 이번엔 초보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어요. 그래서 피처링이나 에픽하이의 무기였던 멜로디에 기대지 않고, 음악을 잘 만들 줄 몰랐을 때의 느낌을 살려보자고 했어요. 약간은 멍청하게요.
투컷: 그런데 전 이제 처음 음악을 만들었을 때의 ‘로(raw)’함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안타까워요.
미쓰라: 명장 느낌으로 가려고 하네.
타블로: 투컷은 여전히 ‘로’해요. 오히려 제가 만드는 방식이 덜 ‘로’하죠. 그래서 잘 합쳐져요. 전 멍청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스타일이고, 투컷은 실제로 멍청하거든요(웃음).
아까 언급한 <High Society>에 수록된 스킷에 사용된 비트를 그대로 따온 ‘신사들의 소신 (GOOD RIDDANCE)’도 인상적이었어요.
타블로: 전 힙합 앨범 들을 때 늘 스킷이 참 재밌다고 느꼈는데, 요즘은 또 스킷을 잘 안 하는 추세더라고요. 그런데 마침 투컷이 스킷을 넣자고 해서 다시 한번 입을 맞췄죠. 오랜만에 다시 만난 신사들처럼요.
미쓰라: 노포 맛집 같은 클래식 비트죠. 그런데 워낙 예전에 만든 비트라 스트링만 오케스트라로 할걸 싶기도 하네요.
또 앨범 작업 과정에서 재밌는 일화를 꼽자면요?
투컷: 며칠 전 에피소드인데, ‘K-DRAMA’가 반응이 가장 좋아서 타이틀 곡을 ‘행복했습니다’에서 그걸로 변경했어요. 타이틀 곡을 바꾼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타블로: 다행히 ‘행복했습니다’에 피처링한 김종완은 그 곡이 타이틀 곡이었던 것도 잘 모를 거예요. 이렇게 된 김에 ‘우산’도 타이틀 곡으로 바꿀까 싶네요. 아무튼 깨달은 게 있는데, 사람들이 선택한 노래가 곧 타이틀 곡이라고 생각해요. 명곡은 저희가 정하는 게 아니니까요.
‘우산’이나 ‘Fly’ 같은 대중이 인정한 명곡부터 지금의 믹스테이프 수록곡까지, 에픽하이는 살펴보면 늘 꾸준한 취향과 색채를 유지했다고 느꼈어요. 미쓰라는 ‘정통 힙합’의 에너지를, 타블로는 서정적인 무드를, 그리고 투컷은 마초스러움을 불어 넣으면서요.
투컷: 만약 한 식당이 맛집으로 입소문이 나도 맛이 변하거나, 메뉴가 달라지면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질 수도 있잖아요. 이처럼 저희도 그룹의 전체적인 무드는 비슷하게 유지하는 것 같아요.
타블로: 반대로 전 에픽하이가 음악적으로는 정말 급진적인 변화를 거쳤다고 생각해요. EDM 사운드를 녹인 곡도 있었고, 모두가 BPM 90대의 곡을 만들 때 저희는 갑자기 BPM을 130까지 올려보기도 했죠. 오히려 에픽하이는 변화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욕을 먹었던 느낌이에요. 당장 ‘ANTI HERO’와 ‘우산’도 한 그룹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너무 다르잖아요.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그건 저희만의 ‘스피릿’이라고 생각해요.
미쓰라: 본질은 항상 있으니까, 거기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거죠. 그런데 이번 음반은 에픽하이의 시작과 특히 가까운 것 같아요.
그럼, 에픽하이의 본질은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타블로: 우리의 본질이 뭐지? 셋 다 성격이 너무 달라서요. 사실 어느 한 본질이 없는 게 에픽하이인가 봐요.
서로 그렇게 다른데도 20년 넘게 함께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타블로: 안 그래도 참 신기해요. 셋이 이렇게나 다른데 멤버 한 명이 나가지도 않았고, 큰 분쟁도 없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물론 개인으로서 저희보다 능력이나, 외적으로 더 잘난 사람들은 있겠죠. 그런데 그렇다고 그 사람들과 함께한다고 팀이 오래 유지됐을 거라는 보장은 없거든요. 그런데 딱 이 세 명. 모자란 부분은 모자라고, 약간 안 맞는 부분은 딱 적당히 안 맞는. 딱 이 정도의 불협화음이 장수의 비결 같아요.
투컷: 지구와 태양의 거리 같은 거죠.
그럼 커리어가 한 편의 서사시, ‘에픽’이라면 지금 에픽하이는 이야기의 어떤 막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나요?
투컷: 책 뒷면의 바코드?
미쓰라: 판단은 저희 몫이 아닌 거 같아요. 저희는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에요. 그런데 만약 그 일에 대한 사람들의 흥미가 떨어진다면 그만두겠죠. 다행히 아직은 괜찮은 거 같아요.
투컷: <원피스>도 20년 넘게 연재 중이잖아요.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타블로: 그런데 <원피스> 캐릭터는 안 늙어. 200년 후에도 그 나이죠.
<원피스>도 ‘정상결전’ 편을 최고로 치잖아요. 이와 비슷하게 지난날을 회고한다면, 에픽하이의 ‘커리어 하이’는 언제였나요? ‘Fly’?
타블로: 몇 가지 순간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은 저희 커리어 하이가 ‘Fly’가 첫 1위를 한 시점부터 ‘Fan’, ‘Love Love Love’가 나오기까지의 시기라고 생각할 거예요. 물론 겉보기엔 그때가 가장 황금기 같아 보일 거예요. 하지만 사실 그 이후에 더 잘 된 순간들이 있어요. 제가 <열꽃>을 낸 뒤 다시 뭉쳐서 ‘BORN HATER’나 ‘노땡큐’를 냈을 때처럼요. 금전적으로는 그때가 훨씬 더 성공적이었거든요. 그런데 또 세계적으로 투어를 다니고, 큰 페스티벌 무대에 설 기회는 지금이 가장 많아요.
다들 ‘리즈 시절’ 같은 표현을 많이 쓰는데, 어느 한 시기가 최고였다고 단정해 버리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황금기를 맞이할 기회를 놓치게 되는 거 같아요. 분명히 다른 관점에서 봤을 때 새로운 황금기들이 계속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또 모르잖아요. 저희가 80살 먹고서 전 세계 최고령 힙합 그룹이 될 수도 있는 거고요.
투컷: 디너쇼 투어! 황금기는 삶의 마지막 바코드를 찍을 때나 알게 되겠죠.
그럼 에픽하이가 한국 힙합 신 전반에 남긴 유산으로는 어떤 게 있다고 생각하나요? 힙합의 대중화?
타블로: 한국에서 힙합으로도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 그리고 가사를 쓰는 방식에 있어서 새로운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가장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거보다 저희가 앞으로 계속 보여주고, 남겨야 할 유산은 따로 있어요. 그저 오랫동안 하는 것.
뮤지션이든, 그림 그리는 사람이든, 아티스트라면 다들 “내가 이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갖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아티스트가 5년 넘게 사랑받는 건 정말 힘들어요. 당장 지금도 저희처럼 오래 활동하고 있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지 않아요. 해봤자 다이나믹 듀오나 넬 정도죠. 그런데 저희조차 그들을 보면서 용기를 얻고, 외롭지 않다는 걸 느껴요. 그러니 다른 분들도 저희가 여러 역경을 겪고서도 계속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RM, 창모, 저스디스를 비롯한 많은 후배 아티스트가 에픽하이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곤 해요. 에픽하이가 그렇게 많은 아티스트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타블로: 이유는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요. 저희는 그저 하나의 긴 흐름 속에 존재할 뿐이에요. 그들은 비록 저희에겐 후배이지만, 누군가에겐 우상,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겠죠. 저희가 다른 선배들에게 영향을 받고, 후배들에게 영감을 줬듯이요.
앞으로 에픽하이는 어떤 그룹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투컷: 꾸준한 그룹이요. 이제 인생의 변수가 더 많아진 만큼 불확실성도 커졌어요. 그러니 지금의 꾸준함을 앞으로도 유지하고 싶습니다. 훗날에도 이 똑같은 질문을 받을 수 있게끔요.
미쓰라: 에픽하이 20주년을 넘긴 순간부터는 내려놓아야 할 것도 많아졌다고 느꼈어요. 이제 큰 변화보다는 지금의 기세를 유지하는 게 좋은 방향 같아요.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시도도 조금씩 하면서요.
타블로: 개인적으로는 저희의 거대한 꿈을 평생 이루지 못하면 좋겠어요. 꿈을 이루는 순간보다는 꿈을 향해 달리는 과정이 가장 즐거운 법이거든요.
그 꿈이 뭔가요?
타블로: 비밀이에요. 너무 거대해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겠네요(웃음). 에픽하이는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그룹으로 남았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