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영인 킴 인터뷰: ‘코리아’와 코리아타운을 잇는 문화 협동 프로젝트
그래미 3관왕 믹스 엔지니어 데이비드 영인 킴의 영원한 도전.
데이비드 영인 킴 인터뷰: ‘코리아’와 코리아타운을 잇는 문화 협동 프로젝트
그래미 3관왕 믹스 엔지니어 데이비드 영인 킴의 영원한 도전.
데이비드 영인 킴(이하 영인)은 한국계 미국인 믹스 엔지니어다. 믹스 엔지니어는 아티스트와 프로듀서 곁에서 음향의 세세한 디테일을 조정해 그들의 비전을 실현한다. 스포트라이트와는 멀어도, 음악계 별들을 탄생시키는 데에는 지대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켄드릭 라마의 <To Pimp A Butterfly>부터 RM의 <Indigo>까지, 영인의 손을 거친 앨범 리스트는 끝이 없다. 그중엔 그래미 트로피까지 안겨준 앨범도 있다. 바로 나스의 <King’s Disease>. 믹스 엔지니어로서는 정상에 올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만, 영인은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영인의 도전 정신은 그가 최근에 발매한 첫 번째 정규 앨범, <Did You Know?, Pt. 1>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앨범이 특별한 이유는 확실하다. 무수히 많은 한국 래퍼의 피처링으로 채워진, 한평생을 미국에서 활동한 믹스 엔지니어의 프로듀서 데뷔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믹싱은 물론, 아티스트 섭외까지 전부 ‘발로 직접 뛰며’ 하는 신인 프로듀서 영인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됐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네 살짜리 꼬마가 ‘그래미 위닝’ 믹스 엔지니어로 거듭나고, 한국으로 돌아와 정규 앨범을 내기까지. 영인의 이야기는 모두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믹스 엔지니어는 어떤 일을 하나?
비트부터 보컬까지, 녹음된 모든 재료를 적절히 배합하고 조정해 듣기 좋은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떨 땐 무려 200개의 사운드를 조정하는 경우도 있다.
믹스 엔지니어가 되기 전엔 녹음 엔지니어로 활동했다. 믹스 엔지니어와 녹음 엔지니어의 차이는 무엇인가?
녹음 엔지니어는 장비 선정부터 마이크 세팅까지, 최고의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한다. 녹음이 잘 된 음악일수록 믹싱 과정도 수월하다. 반면, 녹음이 제대로 안 된 음악을 믹싱하라고 하면 정말 난감하다(웃음).
믹싱을 거치지 않은 녹음 직후의 음악은 어떻게 들리나?
귀를 찢는 느낌. 그밖에 다른 곡과 볼륨이 맞지 않거나 어딘가 언밸런스한 느낌을 줄 때도 있다. 그런 세부적인 디테일을 조정해 아티스트와 프로듀서의 비전을 실현하는 게 내 역할이다.
미국과 한국 리스너가 선호하는 사운드의 차별점이 있다면?
확실히 다르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동차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음악도 자동차 스피커로 듣는 일이 많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음악을 주로 이어폰이나 헤드폰으로 듣는다. 그래서인지 미국 음악은 저음역대를 강조하는 반면, 한국은 보컬과 고음역대를 살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최근 프로듀서로 작업한 첫 정규 앨범, <Did You Know?, Pt. 1>은 어느 나라 방식으로 믹싱했나?
굳이 따지자면 전자. 다른 한국 힙합 음악보다 훨씬 더 강한 킥과 드럼, 그리고 가슴을 내리치는 808 베이스 소리를 느낄 수 있을 거다.
제목의 뜻이 궁금하다.
그래미상을 받은 한국계 엔지니어가 있는 걸 아는지, 내가 프로듀싱을 한 걸 아는지, 내가 이곳에서 태어난 걸 아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답변은 모두 이 앨범 안에 있다.
믹스 엔지니어로 활동하다가 돌연 프로듀서로서 앨범 단위의 작업물을 낸 계기가 무엇인가?
이전에도 프로듀서로 활동한 적은 있었지만, 온전한 내 작업물은 없는 상황이라 호기롭게 도전했다. 사실 처음엔 기존에 작업했던 아티스트를 연락해서 서너 곡 정도를 만드는 게 목표였는데, 혼자서 너무 들뜬 나머지 온갖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며 아티스트를 계속 모았다. 그래서 피처링 진도, 트랙 수도 원래 계획보다 훨씬 많아졌다. 곧 앨범의 두 번째 파트도 나올 예정이다.
앨범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면?
내가 그려온 삶의 궤적. 우선 첫 번째 트랙 ‘Homesick’은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던 내 과거를 담고 있다. 내 인생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거든. 그리고 그다음 트랙 ‘No Lowkey’에선 그런 역경을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Stay lowkey’가 ‘잠자코 있어’라는 뜻인데, 제목처럼 난 실제로 한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다.
음악이 그 노력의 예시 중 하나인가?
음악, 그리고 스포츠. 사실 원래는 미식축구 선수가 되는 게 내 유일한 목표였지만, 고등학생 때 부상을 입으면서 음악에 전념하게 됐다.
처음부터 엔지니어가 되는 게 목표는 아니었을 것 같다.
원래는 랩을 하고 싶었다(웃음). 그런데 나중에 난 랩보다 녹음 이후의 과정을 더 흥미로워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의 세심한 성격과 잘 맞기도 했고.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진학도 자연스레 엔지니어링 쪽으로 하게 되며 지금의 길을 걷게 됐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앨범을 내는 지금, 다시 마이크를 잡아 볼 생각도 있나?
사실 곧 나올 <Did You Know?, Pt. 2>에선 마이크를 잡긴 할 예정이다. 듣기 좋게 잔뜩 왜곡시켰다. 목소리는 몰라도, 엔지니어링엔 자신이 있거든(웃음).
다시 앨범 얘기로 돌아가서, 이번 앨범의 피처링 아티스트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피처링 아티스트도 각 트랙의 메시지를 가장 잘 이해할 사람으로 골랐다. 예컨대 ‘Homesick’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온 폴 블랑코와 갓 전역했을 당시의 창모와 함께했다. 그리고 ‘No Lowkey’에 참여한 제시와 카모는 그들의 당당한 이미지와 곡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한평생을 미국에서 활동했는데, 한국의 아티스트와는 어떻게 이어지게 됐나?
루피나 카모는 과거 함께 작업하면서 만났지만, 대부분은 SNS와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알게 됐다. 그 다음엔 무작정 DM을 보내면서 피처링 진을 차근차근 꾸려 나갔다.
원래도 한국 음악을 즐겨 들었나?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 듣긴 했다. 일단 어렸을 적에 한국에 사는 사촌이 미국에 올 때 들고 온 DJ DOC나 룰라, 드렁큰 타이거의 앨범을 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강렬하다. 그리고 효린과 주영의 ‘지워’도 정말 많이 들었다.
한국 아티스트와 작업해 봐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원래는 미국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한 나머지, 한국 아티스트와 협업할 생각 자체를 못했다. 그러다 이후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루피와 작업한 걸 계기로 한국 신에도 마음을 열게 됐다.
성사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꼭 함께하고 싶었던 아티스트를 꼽자면?
BTS의 RM. RM과는 실제로 일면식도 있다. 그런데 내가 앨범 작업을 시작하려던 찰나에 그가 입대를 해버렸다(웃음). 또 이영지나 지코와도 함께하고 싶었는데, 그들은 연락조차 안 닿았다. 물론 이해는 간다. 그 정도로 유명하면 DM 창은 보지도 않을 테니까. 아무튼 지금까지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스튜디오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을 어깨너머로 보긴 했지만, 프로젝트를 직접 진행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라는 걸 몸소 느꼈다.
그래미 수상자라는 타이틀 덕분에 섭외는 수월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래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미 트로피가 없었다면 한국에서 하는 모든 일의 난도가 한 단계씩 올라갔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웃음).
지금까지 그래미를 무려 세 번이나 수상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무엇인가?
사실 내게 진짜로 의미가 있는 건 나스의 <King’s Disease>를 믹싱해서 받은 그래미 트로피가 유일하다. 그건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믹싱한 거라 성취감이 크다. 반면, 켄드릭 라마의 <To Pimp A Butterfly>, 그리고 닙시 허슬의 ‘Racks In The Middle’로 받은 그래미는 그저 운이 좋았다. 실제로 그 두 곡은 작업 참여율도 낮아서 상도 트로피가 아닌 상장으로 받았다.
처음으로 산 음반도 나스의 <Illmatic>과 <It Was Written>이었다고 들었다.
여덟 살 때 엄마를 졸라서 샀다. ‘클린 버전’이라서 가사도 달랐다. 그런 각별한 추억이 있는 만큼, 나스와의 작업은 정말 뜻깊었다. 작업하는 도중엔 일만 하다가, 세션이 끝나고 스튜디오에 혼자 남으면 그제서야 옛날 생각이 나면서 멍해지고는 했다.
또 이후엔 나스가 공연 백스테이지에 초대해 줬는데, 무대 뒤에서 관객을 보니 눈물이 나오더라. 나스를 맨 앞에서 보려고 공연장에 몇 시간씩 일찍 가던 소년이 여기까지 왔다니. 지금까지 해온 모든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매 순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가?
집념과 끝없는 시행착오. 음악 산업에서 살아남기란 정말 힘들다. 당장 내가 나온 실용음악 대학 동기 수백 명 중에서 지금도 이 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두세 명에 불과하다. 돌이켜보면 나도 정말 막막한 순간이 많았다. 멘토도 없었고, 돈도 얼마 못 받고 일하던 기간도 꽤 길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목표가 궁금하다.
다음 세대의 프로듀서와 엔지니어를 위한 멘토가 되고 싶다. 이 길을 혼자 걷다 보면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약 내 조언이 다음 세대가 음악을 계속할 동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정말 좋을 것 같다.
뜻밖의 대답이다. 한국대중음악상 수상 등의 답변을 기대해 보기도 했는데.
한국에도 음악 관련된 상이 많던데, 아직 뭐가 뭔지는 잘 모른다. 어떻게 받는 건지도 모르겠고. 사실 난 원래 명패나 상장에 큰 의미를 부여한 적 없다(웃음). 내 임무는 확실하다. 다음 세대의 음악인을 양성하고, 한국과 미국 음악 신의 교두보가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