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미친 이들이 추천하는, 설날 특선 레트로 영화 6선

넷플릭스도, VOD도, 심지어 스마트폰도 존재하지 않던 때, 티비에서 하는 특선 영화는 일종의 명절 이벤트처럼 여겨졌다. 설날을 앞두고, 사람들은 신문 앞에 모여 올해 과연 어떤 특선 영화가 상영될지 확인하고는 했다. 간혹 개봉이 얼마 지나지 않은, 새 영화가 특선 방영 목록에 오르기라도 한다면 이는 오래간 화제로 남았다. 그 오래전 사람들은 명절에 어떤 영화를 티비에서 봤을까? 도대체 어떤 영화들이 화제가 됐을까? 남은 연휴 혹은 지루한 귀성길을 알차게 채우기 위해 영화 유튜버, 마케터, 시나리오 작가 등 영화에 미쳐 사는 6명에게 기억에 남는 명절 특선 영화는 과연 무엇인지 물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때, 이들이 추억하는 고전 영화는 다음과 같다.

<쥬만지>, 1995

1990년대를 대표하는 가족 판타지 영화 <쥬만지>는 할리우드의 그리운 전설, 로빈 윌리엄스의 대표작 중 하나다. 정신을 못 차리는 티비를 마구 때려가며 봤던 오리지널 <쥬만지>는 당장 고해상도의 모니터에서 시청해도 여느 최신 영화들을 상회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주사위를 던지며 펼쳐지는, 아날로그 게임의 방대한 세계의 긴장감은 1995년의 ‘초딩’과 2020년의 ‘초딩’을 한 마음으로 만들어 줄 지도 모르겠다. 오리지널을 뛰어넘는 속편은 없다는 사실을 최근 다시 증명한 <쥬만지>는 로빈 윌리엄스의 따뜻한 미소를 잠시나마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삐맨, 유튜브 영화 리뷰어

<빽 투더 퓨처 2>, 1989

설날 특선 영화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전연령 관람 가능가’이다. 이는 단순히 아이들만이 아닌,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기꺼이 즐길 수 있는 영화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추천 영화는 단연 1989년의 <빽 투더 퓨처 2>다. 영화는 시간 여행이라는, 모든 세대가 흥미로워 할 주제 안에 역사, 연애, 가족, 브랜드 등의 요소를 유려한 상상력으로 버무렸다. 나이키, 피자헛, 펩시, 캘빈 클라인 등, 미국 팝 문화를 대표하는 브랜드가 1989년 그린 미래(2015년)에 과연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2020년 지금 세대와 함께 확인하는 일은 복잡하고 새로운 감회를 선사할 것이다. 마치 지금은 없어진 유년의 놀이동산에 지금의 자녀와 함께 노니는 기분. 당시 상상하던 미래의 패션과 지금의 패션은 또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는 것은 영화가 품은 또다른 재미다. 노영균, 영화 마케터

<매트릭스>, 1999

2000년이 오기 전 세상이 끝날 거라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IT 버블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미국,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태동하던 시기에 개봉한 <매트릭스>는(워쇼스키 자매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많은 사람들에게 목표 혹은 위안을 제시했다.이상한 나라로 네오를 이끄는 흰 토끼, 달콤한 현실에 남을 것인지 쓰디쓴 진실을 마주할 것인지를 묻는 모피어스. 사이퍼는 말한다 “이 스테이크가 진짜가 아니란 걸 알아도, 매트릭스가 그렇게 느끼게 만들어주면 되는 거 아냐? 때론 모르는 게 약이야!”, 이 영화로부터 20년이 지났지만, 어쩌면 우리는 더욱 가혹한 시기를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와닿지도 않는 거창한 세상의 끝 따위가 아니라 너무 절절해서 더 구별하기 어려운 불안함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스테이크의 실존’이 아니라 ‘내가 그걸 어떻게 느끼는가’ 라면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감정으로 점철된 신파가 지겹다면 논리와 이성으로 건네는 위로는 어떨까? “휘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에요. 당신의 마음이죠. 숟가락은 없어요.” 튜나, 유튜브 영화 리뷰어

<토이 스토리>, 1995

최근 4편으로 돌아온 우디와 버즈의 <토이 스토리> 시리즈가 1995년 처음 시작됐다는 사실은 퍽 놀랍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토이 스토리 3> 우디와 앤디 이별 장면으로부터도 벌써 10년이나 흘렀으니, 이 새로운 시리즈는 벌써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극중 시간을 현실에 대입하자면 앤디는 벌써 서른 줄에 접어들었다. 설, 오랜만에 찾는 고향집에서 나의 오랜 물건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듯 25년 전 <토이 스토리>의 우디와 버즈를 다시 소환한다. 명절 귀가길, 오랜 추억을 다시 들춰본 후 다시 고이 덮어두어도 좋겠다. 나이를 먹은 건 오직 우리들 뿐이라는 사실과 함께. 조민영, 시나리오 작가

<구니스>, 1985

설날에 가족과 볼만한 영화는 나름 까다롭게 선정해야 한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공감할 수 있고 기본기도 충실해야 한다면 역시 <구니스> 가 되겠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일렁이듯 넘치는 꿈의 세계를, 리처드 도너의 도움으로 완성한  어드벤쳐 영화의 걸작. 성인이 되어 다시 보니 물론 재미있지만,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 꽤나 가혹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구니스>는 CG 같은 건 철저하게 배제된 채로, 직접 정성스레 만든 세트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동굴 탐험, 워터 슬라이드, 해적선 등 기분마저 좋아지는 소년 모험 활극은, 돌이켜보면 왜 2편이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신기할 다름이다. 어떤 나이대의 사람이 보더라도, 보는 사람을 아이처럼 만들어 주는 마법의 영화라는 사실도 퍽 놀랍다. 타노스를 연기한 조쉬 브롤린의 어린 시절과 함께, 귀경길에서 <구니스>에 나온 신디 로퍼의 노래를 꼭 한 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보물 지도를 따라, 유년 시절의 보석 같은 두근거림을 잠시나마 발견하길 바라면서. 기묘한 케이지, 유튜브 영화 리뷰어

<넘버 3>, 1997

영화 <기생충>의 각종 해외 시상 소식을 들으며 새삼 송강호가 처음 스크린에 각인을 새기던 때를 떠올렸다. 수많은 성대모사와 패러디를 낳은 송강호의 ‘헝그리 정신’은 다름 아닌 <넘버 3>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당시 조연이었던 송강호는 원테이크로 촬영된 <넘버 3>의 건달 연기를 통해 한국에 ‘신스틸러’라는 생소한 개념을 전국으로 확장시켰다. 이 외에 “누가 넘버 쓰리래!”의 한석규와 ‘재떨이’ 박상면 그리고 지금은 볼 수 없는 고인, 박광정의 ‘랭보’ 등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조폭무비’의 원류로서 <넘버 3>는 코미디의 고전적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그나저나 23년 전 개봉된 영화의 개그 코드가 2020년에도 이렇게 유효할 수 있다니. 장승호, <하입비스트> 매니징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