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 Road: 페라리 로마
페라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GT 카로 기억될 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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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마니아에게 운전은 단순히 기술적인 행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Open Road’ 시리즈는 자동차의 기능뿐만 아니라 그 차가 지닌 의미에 대해 탐구합니다. 오래된 차든, 새 차든, 해외의 이국적인 차든 상관없이 말이죠. <하입비스트>는 단순히 숫자로만 설명되는 성능 너머, 자동차가 선사하는 순수한 즐거움을 파헤칩니다.
“페라리는 그냥 페라리지.” 페라리 시승을 앞두고 앞서 로마를 타본 적 있는 자동차 전문 기자에게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페라리는 그냥 페라리’라는 말은 별도의 수식이 필요 없는 차라는 뜻이기도 할 테지만, 한두 문장으로 수식할 수 없는 차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페라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는 ‘빠르고 비싼 차’다. 물론 페라리가 빠르고 비싼 차인 것은 사실이지만, 두 가지 수식으로 페라리를 요약하기에는 페라리 팬들에게 있어 그 이름이 지니는 의미는 너무나 크고 또 중요하다.
익히 알려져 있듯 페라리의 창업자, 엔초 페라리는 모터스포츠 레이서 출신이다. 1929년 그는 자신의 레이싱 팀인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만들었고 그 이후 1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페라리는 모터스포츠계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업을 쌓았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페라리에 열광하는 이유도 페라리가 지닌 유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라리의 모든 차들이 그저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달콤한 인생(la nuova Dolce Vita)”. 페라리가 로마를 첫 공개하던 당시 내세운 슬로건이다. 페라리가 이탈리아의 수도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것부터 그 의미가 남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페라리가 주목한 것은 오늘날의 로마가 아닌 1950-60년대의 로마라는 점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도 잘 묘사된 적 있는 당시의 로마는 낭만과 평화가 들끓던 시대였고, 페라리는 이때의 시대상을 같은 이름을 새긴 자동차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페라리는 로마 이전에도 도시의 이름을 빌린 차들을 출시해왔다. 미국의 자유분방한 라이프 스타일을 담고자 했던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창업자 엔초 페라리가 태어난 도시의 이름을 딴 ‘360 모데나’, ‘페라리 본사가 위치한 ‘550 마라넬로’, 페라리의 주행시험용 트랙이 있는 마을의 이름을 가져온 ‘599 피오라노’,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이름을 쓴 ‘포르토피노’가 대표적이다.
로마는 현재 출시되는 페라리 모델 중에서도 가장 빈티지한 디자인을 지녔다. 보닛이 길고 트렁크가 짧은 ‘롱 노즈 숏 데크’ 형태의 2도어 쿠페 실루엣은 페라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차로 손꼽히는 250TR, 디노 256 GT, 250 GT 베를리네타 루쏘를 떠올리게 한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서킷에서 달리는 레이싱카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국도를 따라 여행을 떠나기 위한 GT 카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그 승차감은 페라리 라인업 중에서 가장 편안한 축에 속한다.
<Open Road>를 위해 우리가 받기로 한 로마는 흰색이다. 물론 ‘페라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색은 붉은 ‘로쏘 코르소’이기에 ‘페라리에 흰색이 어울릴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전시장에 주차되어 있는 흰색 로마를 보자마자 이런 생각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보통 페라리 하면 다들 붉은 ‘로쏘 코르소’나 노란색 ‘지알로 모데나’를 먼저 떠올리시는데, 로마는 유독 흰색이나 회색도 잘 어울려요. 아무래도 빈티지한 디자인 때문인 것 같아요.” 현장에 있던 페라리 홍보팀 직원이 말했다.
서랍 아래로 손가락을 집어넣듯 도어 핸들은 쑥하고 밀어 넣자 기분 좋은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운전석에 앉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빨간색 가죽으로 휘감은 스티어링 휠이다. 그 한가운데는 노란색 페라리 엠블럼이 자리하고 있다.
브레이크 페달을 밟은 채 엠블럼 하단의 터치형 시동 버튼을 누르자 옹골찬 엔진음이 주변 가득 울려 퍼진다. 페라리 로마의 기다란 보닛에는 2018년부터 4년 연속 ‘올해의 엔진상’을 수상한 3.9리터 V8 터보 엔진이 들어차 있다. 이 거대한 엔진은 7,500rpm에서 최고 6백20 마력의 힘이라는 어마어마한 힘을 쏟아낸다. 출력은 현존하는 페라리 양산차 중 최상위 모델에 해당하는 SF90 스트라달레에 적용된 것과 똑같은 신형 8단 DCT 변속기와 결합하며 뒷바퀴를 굴린다. 그 결과 로마는 제로백 3.4초라는 놀라운 가속력을 제공한다.
페라리를 처음 탄 사람들이라면 운전에 앞서 당황할 수도 있다. 페라리에는 기어노브가 없기 때문이다. 차를 몰기 위해선 스티어링 휠 뒤쪽에 위치한 오른쪽 패들 시프트를 동시에 당겨 기어 상태를 중립에서 주행으로 바꿔야 한다. 이러한 작동법은 마치 ‘F1’ 드라이버가 된 듯한 감흥을 선사한다.
페라리의 실내 구조는 ‘눈은 도로에, 손은 스티어링 휠에’라는 철학하에 구축된다. 로마의 모든 핵심 기능은 햅틱 컨트롤로 조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페라리 마니아들이 가장 열광하는 것 중 하나는 ‘마네티노 스위치’다. 마네티노 스위치는 스티어링 휠에 두 손을 얹었을 때 오른쪽 엄지가 닿는 부분에 위치한다. 로마는 페라리 GT 모델로는 최초로 5가지 주행모드가 도입됐는데 ‘웨트’, ‘컴포트’, ‘스포츠’, ‘레이스’, ‘ESC 오프’로 주행 모드를 바꿔가며 운전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로마를 타고 서울 시내를 달리고 있자 실제로 구매하는 과정이 궁금했다. “이 차는 받으려면 얼마나 걸리나요?” 옆자리에 동승한 페라리 직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오늘 당장 주문해도 2년 정도 걸려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코로나19 이후 자동차 업계는 너나 할 것 없이 반도체 수급 때문에 생산량이 떨어졌지만, 페라리 대기 시간이 길어진 게 반도체 수급난 때문은 아니다. 페라리는 애초부터 연간 생산량이 워낙 적기 때문에 반도체 수급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최근 페라리의 인기가 천정부지로 솟으면서 대기 시간이 더 늘어났을 뿐이라고.
페라리는 지난 2021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1만1천1백55 대를 팔았다. 같은 기간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많은 판매대수를 기록한 현대 그랜저가 한국에서 8만9천84대 팔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페라리를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에 가까운 일인지 가늠이 간다.
“가격은 얼마나 되나요?” 페라리 로마의 국내 가격은 3억2천만 원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여기에 옵션 사항을 더하면 수천만 원이 더 붙는다. 여느 양산차 브랜드의 최고가 모델보다도 비싼 가격이다. 가격을 듣고 다니 엔초 페라리가 한 말이 떠올랐다. “페라리는 모두에게 꿈이다.” 가격으로나 희소성으로나 페라리는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차가 아니구나 싶다가도, 차에서 내려 다시 로마를 쳐다보고 있자니 이 정도는 되어야 자신있게 ‘꿈의 자동차’ 라고 소개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페라리는 그런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