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인서 인터뷰: 새 보금자리에서 되짚는 10년의 발자취 그리고 도약
“저희가 입을 수 있고, 입고 싶은 옷을 만들어요.”
혜인서가 신사동 가로수길과 압구정역 사이의 한적한 골목에 새 둥지를 틀었다. 브랜드 론칭 10주년을 앞두고 마련한 첫 번째 단독 스토어인 만큼, 이진호 대표와 서혜인 디자이너의 감회도 남다를 터. 하지만 이들은 커다란 간판 대신 통유리 문 옆에 조그맣게 브랜드 로고를 새겼다.
탁 트인 쇼윈도 너머로 보이는 혜인서의 오프라인 스토어를 방문하면, 공간 중앙을 관통하는 철 구조물과 깔끔한 아이보리 컬러의 벽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유려한 곡선 실루엣이 돋보이는 철제 파티션 뒤로 캐셔가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다. 이진호 대표와 서혜인 디자이너는 “각기 다른 컬렉션에 따라 언제든지 공간을 유연하게 꾸미기 위해서” 이런 구조를 고안했다. 그래서일까 미니멀한 이 공간은 스토어인 동시에 쇼룸 같기도 한 분위기를 강렬하게 풍겼다.
서울 스토어 오픈과 함께, 이진호 대표와 서혜인 디자이너를 만나 혜인서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또 무얼 향해 달리고 싶은지 물었다.
론칭 10주년을 앞두고 마련한 혜인서 서울 스토어는 어떤 공간인가요?
이진호: 서울에는 아직까지 혜인서 풀 컬렉션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 없었어요. 그리고 이 점과 관련해 고객들의 피드백을 꾸준히 듣다 보니 자연스레 스토어에 대한 필요성도 느꼈고요. 혜인서 서울 스토어는 고객들이 방문해 단순히 옷을 구경하는 것 그 이상으로, 브랜드가 추구하는 정체성을 한곳에 집결해 보여드리고자 마련된 공간입니다.
미니멀한 공간을 둘러싼 차분한 아이보리 컬러 벽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와요. 전반적인 내부 디자인은 어떻게 고안했나요?
서혜인: 스토어가 가변적인 공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상황에 맞춰 공간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이진호: 향후 각기 다른 시즌 컬렉션 콘셉트에 따라 그때그때 공간에 쉽게 변주를 줄 수 있도록, 집기들을 최소한으로 세팅해두었어요. 일반적으로 리테일 공간에 들어가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수납장과 선반 및 계산대를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습니다.
스토어 곳곳에 채워진 최신 컬렉션은 어디서 영감을 받았나요?
서혜인: 스튜디오 지브리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큰 영향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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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혜인서 컬렉션 룩북에는 미즈하라 키코, 포토그래퍼 모니카 모기와 Y2K92 지빈이 참여했어요. 이 조합은 어떻게 결성됐나요?
서혜인: 모니카 모기와는 이전에 작업을 몇 차례 함께 하면서 친구가 됐어요. 모니카 모기가 일본 야쿠시마 섬에 조그맣게 별장이 생겼다며 같이 촬영을 하면 좋겠다고 먼저 제안했는데요. 특히 혜인서의 이번 컬렉션이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만든 것이라 딱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니카 모기가 원래부터 미즈하라 키코와 작업을 많이 하는 친구였어서, 이번 룩북을 미즈하라 키코와 촬영할 수 있었죠. Y2K92의 지빈은 제가 원했어요. 그렇게 같이 일본에 가게 됐고요.
이런 배경 덕에 룩북에서도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해요.
서혜인: 실제로 친한 친구들끼리 여행하는 느낌으로 촬영해서 결과물이 좀 더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조명을 들기도 했고요. 최소한의 인원으로 촬영을 진행해서, 저희 사이의 친밀감이 사진에 잘 담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햬인서의 인스타그램 계정엔 특히 룩북 모델에 대해 묻는 댓글이 굉장히 많아요. 특별한 모델 선정 기준이 있나요?
서혜인: 개인적으로 본인 작업을 따로 하고 있거나 강렬한 캐릭터를 가진 모델을 선호해요. 컬렉션 촬영 현장에서도 모델 본연의 캐릭터를 많이 녹여낼 수 있는.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컬렉션 주제를 훨씬 더 잘 이해하고 표현해 내는 것 같아요.
보통 캠페인 비주얼에 긴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 편인데, 거기에도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진호: 혜인서는 지금까지 ‘이 컬렉션은 이런 의도로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끝이 났다’라는 장문의 글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저희가 일방적으로 정의내리기보다 어느 정도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커서 말을 아껴왔습니다.
2023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아이템을 꼽는다면요?
이진호: 저는 워시드 카고 팬츠와 컬렉션 전반에 쓰인 실버 액세서리.
먼저 워시드 카고 팬츠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카고 팬츠 디자인에 혜인서만의 디테일이 많이 가미된 아이템이라 애정이 가요. 특히 여러 시즌에 걸쳐 수차례 재해석되고, 조금씩 변형을 주면서 발전시켜왔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져 이 아이템을 골랐어요. 혜인서가 지금까지 선보인 워시드 카고 팬츠를 나란히 펼쳐 두고 보면, 그 진화의 과정이 보여 흥미롭답니다.
실버 액세서리 같은 경우에는, 혜인서 팀에 많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그걸 최종 메탈로 구현해 내기까지 어려운 부분이 분명 있었거든요. 하지만 전문적인 주얼리 디자이너를 통해 결국 제대로 만들어낼 수 있었고요. 또 그 덕분에 실버 액세서리가 제품군 전반에 함께 스타일링되며, 컬렉션 자체의 완성도와 밀도도 함께 높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혜인: 저는 제가 직접 손뜨개질로 완성한 패디드 코트와 슬링백을 꼽고 싶어요.
솜에다 한 땀 한 땀 구슬과 깃털을 꿰서 완성한 제품이예요. 디자이너지만 아무래도 판매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보통은 컬렉션을 구성할 때, 꼭 만들고 싶었던 아이템뿐 아니라 잘 팔리는 아이템과 고객들이 원하는 아이템 등도 더불어 고려를 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이 가방처럼 시간과 공을 많이 들여 완성한 피스들은 비록 매스 프로덕션을 진행할 수 없어도, 디자이너 욕심을 조금 부려보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가요.
원래 손으로 자수를 놓거나 니트 뜨개질 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브랜드가 커질수록 손으로 하는 작업을 컬렉션에 포함시키기가 점점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래도 이번엔 손으로 만든 아이템을 한두 개 정도 꼭 넣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어 기뻤어요.
혜인서라는 브랜드의 중심엔 어떤 정체성이 있나요?
이진호: ‘이런 브랜드도 있을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어떤 큰 메인스트림의 흐름을 따라가기보다 그때그때 혜인서 팀이 하고 싶은 것을 결단력 있게 밀어붙이려고 해요.
브랜드 운영 초기에 비교적 빠르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서,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시즌에 보여준 제품을 계속 원하는 바이어와 고객들이 있었는데요. 그렇게 반복하는 브랜드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또한 현 패션 시장에는 좋은 소재와 고급 마감을 자랑하는 하이엔드 브랜드도 있고,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퀄리티의 옷을 제공하는 SPA 브랜드도 있잖아요. 혜인서는 그러한 브랜드의 사이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서혜인: 혜인서의 가장 큰 강점이자 핵심 아이덴티티는 타 브랜드에 비해 내러티브적 요소가 많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옷 디자인에 신경을 쓰는 만큼이나 늘 컬렉션 파이널 룩북 및 캠페인 이미지를 줄곧 염두에 두고 작업을 시작하거든요.
최근 몇 년의 혜인서 컬렉션은 주로 뉴트럴한 컬러 팔레트가 적극적으로 이용되는 것 같아요.
서혜인: 보일 때 예쁜 옷과 실제로 입었을 때 예쁜 옷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요. 런웨이 쇼에 초점을 맞춰 디자인한 컬러풀한 옷들은 실생활에서 데일리로 입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더라고요.
저희 모토는 혜인서 팀이 입을 수 있고 또 입고 싶은 옷을 만드는 것인데요.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하다 보니 제품군 색감이 뉴트럴해진 것 같아요. ‘실질적으로 사람들이 살까?’ 혹은 ‘우리가 자주 입고 다닐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컬러를 선정했어요.
디자인부터 촬영과 브랜드 운영까지, 모든 과정에 신경을 쓰다 보면 매일이 무척 바쁠 것 같아요. 그래도 틈틈이 생기는 개인 시간은 어떻게 보내나요?
이진호: 제가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브랜드를 운영하는 지금까지 줄곧 느껴왔던 문제가, 작업에만 너무 매달려있다 보면 어느 순간 쌓아온 것들이 전부 소진된다는 점이에요. 디자인적으로든 에너지든 다 소비되고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취미 생활을 하는 시간만큼은 건강하고 재밌게 그 순간을 보내는 데 집중합니다.
제가 평소 굉장한 스포츠맨은 아니지만, 작년과 재작년에는 자전거에 관심이 많았고 자동차 레이싱에도 빠져있었네요.
서혜인: 집에서 책이나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에요. 소설이나 시도 굉장히 좋아해서, 텍스트에서 컬렉션 영감을 받는 경우도 있어요.
향후 컬렉션에서 도전해 보고 싶은 새로운 목표가 있나요?
이진호: 정확히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자리를 잡고 저희가 더 이상 스케줄에 쫓기지 않는 시점이 오면, 저는 개인적으로 잘 디자인된 제품을 꾸준히 제안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패션이 워낙 빠르긴 하지만, 한 시즌만 흘러도 이미 지난 컬렉션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쉽고 싫더라고요. 예를 들면, 잘 만든 4B 연필은 크게 뭐가 바뀌지 않더라도 꾸준히 같은 스펙으로 계속 제공될 수 있잖아요. 같은 원리의 스마트 디자인 개념으로, 옷을 가지고 혜인서가 할 수 있는 부분들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서혜인: 일단 저는 다른 브랜드들과 협업을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어요. 이전까지는 요청은 많았지만 여유가 없어서 시도해 보지 못했는데, 이제야 할 수 있는 시점이 온 것 같아요. 꼭 의류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신발과 오브제 등의 카테고리를 넘나드는 협업도 재밌을 것 같아요.
또 매스 프로덕션을 하다 보면, 이른바 모서리를 깎아내는 과정을 계속 해야 하거든요. 개인적으로 옷을 직접 만드는 즐거움을 많이 잊어버린 것 같아서, 시간의 흔적이 보이는 아이템들을 디자인하는 기회를 좀 더 마련해 보고 싶어요.
혜인서의 먼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나요?
서혜인: 옷을 디자인하고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지치는 순간들이 많았는데요. 삶의 균형을 찾아서 아주 오래오래 작업하는 것이 목표예요. 크게 성장하겠다는 비전을 잡기보다는, 즐길 수 있을 만큼만 꾸준히 저희 만의 이야기를 하는 브랜드가 되고 싶어요. 오래 일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