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entials: 정백석
낡을수록 더 멋진 물건들에 대하여.

렉토 디렉터 정백석은 오래된 것들을 대하는 법을 알고 있다. 닳아 헤진 재단가위를 손에 쥘 때마다 마음이 정돈된다고 말했고, 첫 번째 벤 레더 점퍼를 친구에게 건넸던 일을 여전히 후회했다. 그의 애정은 물건의 가격이나 희소성에 있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입고, 시간을 통과하며 생기는 질감이야말로 진짜 멋이라 믿어왔다.
그 믿음은 옷으로 이어졌다. 21FW 시즌 처음 선보인 렉토 벤 레더 점퍼는 70년대 빈티지 무드와 락 시크 감성을 품으며 렉토의 얼굴이 됐다. 10년 넘게 입어온 캠버 티셔츠는 낡을수록 멋이 깊어진다는 그의 생각을 증명한다. 시간이 만든 빈티지 아이템들은 그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하입비스트>는 그런 정백석의 시선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오래 입을수록 멋이 깊어지고, 시간이 만든 주름과 질감을 기꺼이 즐기는 그의 에센셜 아이템들은 무엇일까. 리스트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렉토 ‘벤 레더 점퍼’
레더 점퍼에 대한 애정이 깊어요. 언젠가 제 시그니처처럼 자주 입는 부츠컷 데님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레더 점퍼를 직접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죠. 벤 점퍼는 그렇게 21FW 시즌 렉토 남성복 라인에서 처음 선보였고, 70년대의 빈티지 무드와 락 시크한 감성이 조화를 이루며 브랜드 특유의 무드를 담아냈어요. 시즌마다 소재를 바꾸며 새롭게 제안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태도는 늘 유지되고 있어요. 지금은 렉토를 대표하는 에센셜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어요.
아직도 아쉬운 건 첫 번째 벤 점퍼를 친구에게 선물해버린 일이에요. 지금도 다시 되찾고 싶을 만큼 애착이 큰 아이템이거든요. 언젠가 렉토만의 레더 컬렉션을 꼭 해보고 싶어요. 저에게 레더는 브랜드의 감도와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고, 그 안의 가치를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핵심적인 질감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가을엔 또 한 번 진화한 새로운 ‘벤’ 시리즈가 출시될 예정이에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재단 가위
20년째 곁에 있는 낡은 재단가위예요. 처음부터 함께했던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손에 익었고 지금은 잡는 감촉만으로도 마음이 정돈돼요. 가봉을 볼 때 이 가위를 들면 괜히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묵묵히 좋은 기운을 주는 것 같아요. 날은 너무 많이 갈아서 지금은 위험할 만큼 날카롭고, 손잡이에 묶은 빨간 끈은 더 강한 에너지를 담고 싶어서 직접 묶었어요. 한 번은 이 가위를 잃어버려서 일주일 내내 작업실을 헤매며 예민해졌던 기억이 있어요. 수많은 옷을 잘라내고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 이 가위는 제 커리어의 가장 조용한 동반자예요. 언젠가 제가 재단가위를 놓게 되더라도 이 가위만큼은 평생 곁에 둘 거예요. 시간이 남긴 가장 깊고 은밀한 기록이니까요.
벨바쉰 미키마우스 프린트 빈티지 스웨트 셔츠
정말 좋아하는 빈티지 숍에서 발견한 제품이에요. 크랙이 멋지게 남은 프린트 질감, 바랜 색감, 낡은 스웨트셔츠 특유의 핏까지 모든 요소가 완벽했어요. 특히 미키마우스, 미니, 구피가 함께 있는 유쾌한 그래픽은 시대를 초월하는 매력이 있어요. 키치하지만 과하지 않고, 빈티지 아이템이 줄 수 있는 위트와 에너지가 담겨 있어요.
캠버 헤비웨이트 티셔츠
제 인생 티셔츠라고 해도 될 만큼 단연 1등이에요. 처음 만난 건 10여 년 전 일본의 한 편집숍이었고, 그날 이후 사계절 내내 입고 있어요. 지금은 국내에서도 구매할 수 있지만, 제겐 여전히 첫 발견의 기억이 특별해요. 핏은 단순하고 투박하지만 입고 빨고를 반복하면서 10년쯤 지나니 오히려 빈티지 오리지널 같은 분위기가 생겼어요. 낡을수록 멋이 쌓인다는 걸 이 티셔츠가 보여줬어요.
제 인스타그램을 보면 룩 대부분에 이 티셔츠가 있어요. 화이트와 블랙은 거의 유니폼처럼 입고 있고, DM으로 어디 제품이냐고 묻는 분들도 많아요. 가끔은 소매를 잘라 90년대 무드로 입기도 해요. 거칠고 루즈한 실루엣이 지금의 스타일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려요. 캠버는 입을수록 스타일이 쌓이는 옷이에요. 처음엔 평범해 보여도 시간이 만든 밀도와 표정이 분명히 있어요.
빈티지 바슈롬 레이밴 선글라스
Bausch & Lomb 시절, 미국에서 제작된 레이벤 웨이페어러 빈티지 모델이에요.. 흔한 블랙 컬러가 아닌 브라운과 블랙이 믹스된 독특한 조합이 인상적이며, 단 하나뿐이라는 설명에 이끌려 구입하게 됐어요. 한남동 빈티지 안경 셀렉숍 OLD GOOD THING에서 구했는데, 이미 안경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에요.
셀린 피비 파일로 에라
피비 파일로가 이끌던 시기의 셀린 선글라스예요. 전형적인 셀린 이미지와 조금 달라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안경처럼 보이는 디자인, 블루 톤 라이트 렌즈, 빈티지한 다크 브라운 프레임이 어우러져 착용하면 독특해 보여요. 특별한 날에만 꺼내는 아이템이에요.
리바이스 517
리바이스 517은 오랜 시간 입어왔고, 제게 빠질 수 없는 인생 아이템이예요. 517은 제 체형에 가장 이상적인 실루엣을 만들어주는 데님이에요. 플레어 라인이 다리를 길어 보이게 하고, 특히 앵클부츠와의 조합은 완벽한 스타일 공식처럼 느껴져요. 이 둘의 밸런스는 지금까지도 제 옷장에서 가장 자주 손이 가는 조합이에요.
70~80년대에 제작된 다양한 리바이스 플레어 데님을 꾸준히 수집하고 있고, 빈티지 517 역시 오랜 시간 애정을 담아 모으고 있어요. 특히 구매할 때는 제작 연도와 워싱 컬러를 중요하게 봐요. 시대마다 달라지는 데님의 컬러와 질감이 그 시기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어서 그런 디테일 하나하나가 소중해요.
빈티지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 파텍 필립 1970’s 골든 엘립스
빈티지 시계를 오래 좋아했어요. 지금까지 모은 시계 대부분은 골드 케이스에 블랙 밴드 조합이에요. 그중에서도 파텍필립 1970년대 골든 엘립스는 제 컬렉션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시계인데요. 몇 년 전 스스로에게 선물로 샀어요. 러그가 생략된 타원형 케이스와 짙은 오닉스 다이얼, 18K 골드 케이스가 절제된 품위를 보여줘요.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모델이라 더 특별하게 느껴져요.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해온, 언젠가는 꼭 갖고 싶었던 시계였어요. 뜻밖에도 지인에게 1980년대 제작된 빈티지 모델을 선물받았고, 그 순간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요. 이 모델은 18K 골드 케이스가 적용된 고전적인 리베르소 라인으로, 1980년대의 정제된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화려하지 않지만 조용히 빛나는 존재감이 있어요. 손목 위에 올렸을 때 느껴지는 단단한 무게감과 세월이 만든 깊이는 새 제품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함이에요. 저를 생각하는 마음이 담긴 선물이기에 더 큰 애정을 갖게 돼요.
더 로우 누 미니 트윈 스웨이드 백
몇 년 전 구입해 지금까지 꾸준히 사용하는 가방이에요. 특히 브라운 스웨이드 소재가 마음에 들어 자주 들고 있어요. 사이즈는 작지만 수납력이 좋아 필요한 소지품은 모두 들어가요. 어깨에 메기보다는 파우치처럼 손에 드는 걸 선호해요. 스웨이드 소재는 민감하지만 따로 관리하지 않고 사용해요. 시간이 만들어주는 빈티지한 질감을 자연스럽게 즐기는 편이에요. 가격대는 높았지만, 더 로우의 균형 잡힌 디자인과 소재의 퀄리티는 충분히 그 가치를 증명해줬어요. 큰 백을 들 때는 이 미니백을 통째로 넣어 다녀요. 매번 물건을 옮겨 담지 않아도 바로 꺼내 들 수 있어 실용적이에요.
샤넬 코르망델, 마티에르 프리미에르의 팔콘 레더
저는 향에 민감한 편이에요. 플로럴이나 시트러스 계열처럼 가볍고 흔한 향은 좋아하지 않고, 우디 계열의 깊은 향이나 잔향이 남는 향을 선호해요. 향의 밀도를 느끼기 위해 샴푸나 바디로션도 향이 없는 제품을 써요. 샤넬 코르망델은 젠더리스한 우디 향이에요. 씁쓸한 시트러스 노트가 패츌리의 묵직한 잔향과 어우러져 독특하고 깊은 인상을 남겨요. 룩에 밀도 있는 마무리를 더해주는 향이에요.
마티에르 프리미에르 팔콘 레더는 ‘매 사육사의 장갑’에서 영감을 받은 향수예요. 강한 가죽 향과 스웨이드 느낌이 섞인 진한 향이 특징이에요. 국내에서는 판매되지 않아 몇 년 전 파리 ‘도버 퍼퓸 바’에서 처음 구입했고, 이후로 파리에 갈 때마다 다시 사오고 있어요.
빈티지 미니 카메라
얼마 전 인스타그램 광고를 보고 구입했어요. 90년대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고 싶을 때 가볍게 쓰기 좋은 카메라예요. 사진은 물론 동영상 촬영도 가능해요. 지난 3월 발리 휴가 때 여러 장면을 이 카메라로 찍었는데, 작은 사이즈와 특유의 톤 덕분에 그 순간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최근 20대 초반에 사용하던 소니 사이버샷 디지털 카메라를 다시 찾으면서, 앞으로는 이 카메라는 거의 쓰지 않을 것 같아요. 오래전에 잃어버린 줄 알았던 카메라를 다시 손에 넣으니 그 안에 담긴 기억까지 함께 돌아오는 기분이었어요.
에르메스 켈리 클로체트 시계 목걸이
이 목걸이 스타일의 클로체트 시계는 마틴 마르지엘라가 에르메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절 런웨이에서 선보였던 아이템이에요. 빈티지로 구입했어요. 갈색 가죽 스트랩은 목걸이로 착용하거나 백에 달아 참처럼 연출할 수 있어요. 골드 톤 메탈의 켈리 잠금 장치와 쿼츠 무브먼트 시계가 결합돼 미니멀하면서도 독특한 존재감을 보여줘요.
에르메스 케입 코드 더블 스트랩 빈티지 시계
올해 생일에 선물로 받은 시계예요. 1988년 마르지엘라가 에르메스 런웨이에서 처음 선보인 더블 랩 어라운드 스트랩 디자인으로, 손목을 두 번 감싸는 실루엣이 특징이에요. 세월이 느껴지는 가죽 스트랩이 클래식하면서도 정교한 에르메스의 분위기를 완성해줘요. 마르지엘라가 에르메스에 있던 시기의 모델이라는 점이 제게는 큰 의미가 있어요. 곧 다가올 가을엔 그레이 컬러 니트와 함께 매치할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