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 만드는 사람들 5
자신의 이름을 내건 로고부터 여러 밈으로 채워진 티셔츠까지.
군인의 속옷에서 출발한 티셔츠는 오늘날 옷장의 필수 품목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더불어 티셔츠는 패션 시장에서도 중요한 상품이다. 스트리트웨어 브랜드부터 럭셔리 브랜드까지, 티셔츠를 만들지 않는 브랜드를 찾는 게 더 힘들 정도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국내에서 티셔츠를 직접 만드는 개인도 부쩍 늘었다.
개인이 만드는 티셔츠는 대형 브랜드의 제품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제품 위엔 깔끔한 로고나 정제된 그래픽 대신 제작자가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이 여과 없이 그려지고, 홍보도 대부분 SNS상에서만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제품 자체가 하나의 ‘밈’이 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런 차별점은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이 개인 티셔츠 제작자에 열광하는 현상을 만들어냈다.
‘팬 앤 픽셀’ 스타일의 그래픽으로 한국적인 이미지를 풀어내는 김도영의 티셔츠부터 자신의 이름을 본뜬 로고를 박은 태호서울의 티셔츠까지, <하입비스트>가 다양한 디자인의 티셔츠를 만드는 다섯 명의 인물을 만났다.
김도영
어떤 티셔츠를 만드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담긴 티셔츠.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기술적인 부분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꾸준히 공부해서 내가 아니면 세상에 나오지 않을 티셔츠들을 만들고 싶다.
티셔츠를 만들기 시작한 계기는?
열아홉 살 때 친구들과 단체 티를 만든 것. 원래부터 무언가를 만들거나 기획하는 걸 좋아했는데, 메시지를 전달하고 나를 브랜딩하는 데엔 티셔츠가 제격이었다. 지금도 티셔츠는 내게 캔버스이자 광고판이다.
주된 영감의 원천은?
삶 그 자체. 일상을 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들을 메모장에 적거나 캡처해 두곤 한다. 반면, 뭔가를 억지로 만들어 내는 건 정말 못한다.
티셔츠에 특별한 의미를 담기도 하나?
인물 그래픽엔 그 인물에 대한 애정을, 레터링엔 내 주관적인 생각을 주로 담는다. 더 넓게 보면 내 삶을 담는다고 봐도 된다.
가장 마음에 드는 티셔츠는?
빈지노 형의 친필 사인이 적힌 ‘빈지노’ 티셔츠. 어떤 무시당하는 일을 겪어도 그 사인이 부적처럼 내 마지막 자존감을 지켜 줬다. 지금 그 티셔츠는 내 작업실의 액자에 잘 보관하고 있다.
티셔츠 판매로 매장까지 차리게 됐다. 처음 만든 티셔츠와 지금의 티셔츠는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하나?
처음 시작하던 때의 티셔츠는 날 것에 가까웠다. 생각나는 대로 내 취향을 담았고, 한글을 가감 없이 사용했다. 그땐 디자인이 부담스럽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래서 그로부터 약 10년 동안은 사람들이 어떤 걸 좋아할 지 나름 신경을 썼다. 하지만 이젠 ‘요일’ 티셔츠나 ‘새끼’ 티셔츠처럼 다시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눈치 보지 않고 내놓는 중이다. 처음에 만든 티셔츠와 지금의 티셔츠가 비로소 다시 같아진 셈이다.
많은 래퍼와 협업을 진행했는데, 추가로 협업하고 싶은 래퍼나 인물이 있나?
협업에 대한 욕심은 작년에 에이셉 라키가 내가 만든 바지를 입은 뒤로 완전히 사라졌다. 내 기준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 내 것을 인정해 줬으니까. 이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훨씬 재밌다. 앞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게끔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태호서울
어떤 티셔츠를 만드나?
내가 좋아하는 글이나 도형을 새긴, 내가 좋아하는 핏의 티셔츠.
티셔츠를 만들기 시작한 계기는?
작년쯤 이젠 내게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부터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현실로 구체화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태호서울이다.
주된 영감의 원천은?
나, 권태호의 삶. 내가 힙합을 좋아하니 티셔츠에 ‘나 그녀랑 헤어졌어 그녀가 힙합이 아니어서’라는 문구를 박고, 난 대한민국 태생의 사람이니 제품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식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티셔츠는?
태호서울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브랜드를 시작하기 전, 브랜드 로고를 고민하다가 문득 내 본명인 ‘태호’에서 따온 로고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러다 지금의 로고를 떠올랐고, 즉시 “와 이거다”라고 하고 힙합 음악을 크게 튼 기억이 아직도 어제 같다. 장소도 똑똑히 기억난다. 동대문 종합시장 6층에 있는 공차였다.
주로 길거리에서 티셔츠 홍보와 판매를 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게 된 계기가 있나?
우선 나는 1백만 원으로 브랜드를 시작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광고를 할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무작정 청와대 앞에 샘플 티셔츠를 들고 가 홍보 영상을 찍었다. 티셔츠 디자인이 주는 느낌과 시위를 연상케 하는 홍보 방식, 그리고 청와대라는 배경이 어우러져 나를 미치게 했다. 그렇게 한 번 해보니 승산이 보였다. 그래서 난 지금도 밖으로 향한다.
‘그녀와 헤어졌어 그녀가 힙합이 아니어서’라는 문구로 주목을 받았는데, 태호서울이 생각하는 힙합이란 무엇인가?
솔직함. 그래서 아직은 부족한 게 많더라도 일단 나와 내 사람들에게라도 솔직해지려고 한다.
러시아워타임즈
어떤 티셔츠를 만드나?
평소에 사랑하는 서브컬처와 밈, 힙합과 관련된 부틀렉 티셔츠를 만든다.
티셔츠를 만들기 시작한 계기는?
외국 빈티지 티셔츠에 많이 보이는 발칙하고 재치 있는 그래픽을 한국적인 요소와 섞은 티셔츠를 만들고 싶어서 시작하였다.
주된 영감의 원천은?
힙합. 음악은 물론, 아티스트의 비하인드 스토리 등에서도 영감을 받는다.
가장 마음에 드는 티셔츠는?
‘아편한 세상’ 티셔츠. 이 티셔츠를 기점으로 더욱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한 만큼, 지금도 이 제품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다.
만드는 티셔츠 그래픽은 하나의 ‘밈’에 가까워 보이는데, 최근에 재밌게 본 밈이나 밈 페이지가 있나?
“엄마가 싫어하는 것”을 슬로건으로 삼은 ‘이래라’라는 인스타그램 페이지 겸 문화 공간. 여러 분야에 걸친 정보와 밈, 행사 기획까지, 폭 넓은 콘텐츠를 갖췄다는 점에서 여타 밈 페이지와는 다르다.
주로 힙합 문화를 레퍼런스한 그래픽을 선보이고 있다. 제일 좋아하는 래퍼를 꼽자면?
지금의 힙합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래퍼 중 한 명인 치프 키프. 멈블 랩과 드릴처럼 지금까지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는 여러 사운드의 개척자였기 때문이다. 독보적인 패션 스타일과 태도는 덤. 그래서 그를 주제로 한 그래픽 티셔츠를 여러 개 만들기도 했다.
서울 컬트
어떤 티셔츠를 만드나?
그림이나 문구가 인쇄된 그래픽 티셔츠를 주로 만든다. 혹자는 선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모두 나를 잘 대변하는 그래픽이라고 생각한다.
티셔츠를 만들기 시작한 계기는?
현재 보컬로 활동하고 있는 ‘구토와 눈물’이라는 밴드의 로고 티셔츠 제작이 계기였다.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도 좋아서 계속 만들었다.
주된 영감의 원천은?
음반이나 티셔츠 등 어렸을 때 간절히 갖고 싶었으나 갖지 못한 것들. 더불어 그때그때의 소소한 관심사나 즐겨 듣는 음악에서도 조금씩 영향을 받는다.
가장 마음에 드는 티셔츠는?
‘구토와 눈물’ 로고 티셔츠. 처음 만든 티셔츠이기도 하고, 내가 속한 밴드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이즈를 대부분 작게 만들기도 했고, 제작 수량도 많지 않아 정작 내가 갖고 있는 건 거의 없다.
지금 서울의 컬트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금 서울엔 컬트라고 여길 만큼 열광할 만한 대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억지스럽게 여러 의미를 부여하며 서울이 거창한 문화를 갖춘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종종 눈에 띈다. 그 모습이 마치 사이비 종교에 넘어간 광신도 같아 보였고, 그걸 꼬집으려는 의도로 ‘서울 컬트’라는 이름을 지었다.
‘구토와 눈물’이라는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하고 있는데, 서울 컬트와 해당 밴드엔 어떤 접점이 있나?
서울 컬트라는 이름으로 티셔츠를 만들기 한참 전, 밴드 활동을 할 때부터 밴드 로고나 앨범 아트워크 등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내 티셔츠를 모아서 보면 모두 공통된 무드가 녹아 있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몰리치
어떤 티셔츠를 만드나?
인터넷 밈을 활용한 재밌고 허탈한 티셔츠를 만든다. 몰리치와 별개로 티셔츠 외주 작업도 많이 하고 있다.
티셔츠를 만들기 시작한 계기는?
2016년쯤 나만의 실크스크린 장비를 갖고 싶어서 이를 직접 용접해서 만든 게 시작이었다. 당시 내가 활동하던 밴드의 티셔츠는 물론, 다양한 티셔츠 외주 작업도 함께 진행했다. 그 시기에 중간중간 개인 작업처럼 만든 재밌는 티셔츠들이 모여 지금의 브랜드가 됐다.
이센스와 장석훈 등, 많은 아티스트가 몰리치의 제품을 착용했다. 간단한 디자인의 티셔츠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직관적인 디자인 덕분 아닐까. 물론 처음으로 제품을 출시했을 땐 대충 만든 것 같다는 의견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하다 보니 사람들의 반응은 곧 괜찮아졌다. 또 한 영상에서 내가 만든 티셔츠를 단체로 맞춰 입고 나온 사람들을 보기도 했는데, 그때 내 제품의 인기를 조금 실감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티셔츠는?
지금 입고 있는 ‘샘플’ 티셔츠. 일본의 ‘돈키호테’나 음반점 등에서 샘플 상품에 붙이는 동그란 견본 스티커에서 디자인을 따왔다. 비록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아니지만, 샘플 티셔츠를 제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내 직업의 특징을 잘 반영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든다.
과거 인스타그램을 통해 <GTA> 시리즈 속 옷 가게인 ‘빙코’가 되는 게 목표라고 얘기한 적 있는데, 그 목표는 지금도 유효한가?
<GTA> 시리즈엔 스케이트웨어를 파는 곳부터 양복점까지, 정말 많은 옷 가게가 등장한다. 그중 ‘빙코’는 스토리 초반에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는 옷 가게다. 게임 세계관 내에선 싸구려 티셔츠를 파는 곳이지만, 내 눈엔 ‘빙코’의 옷이 가장 멋져 보였다. 그래서 나도 가장 근사하진 않더라도, 재밌는 티셔츠를 만들려고 한다.
주된 영감의 원천이 무엇인가? <GTA>는 아닐 것 같다.
인터넷 밈. ‘즐겁다’는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껍질-미리 깐 달걀’이라는 제품의 ‘즐겁다’라는 설명이 오역된 사진을 보고 만들었고, ‘왜?’ 티셔츠는 ‘활원’이라는 음료 광고에서 유동근 배우가 “왜, 피곤하니까!”라고 외치는 멘트에서 따왔다. 특정하자면 일본이나 예전 한국 TV에서 접할 법한 무드를 선호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