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카겔 인터뷰: 네 사람의 네 가지 동기가 앙상블이 되다
계기에서 동기로 나아가는 ‘머신 보이’ EP.
요즘 가장 큰 관심사가 뭐예요?
김한주: 저는 최근에 친구 고양이를 잠깐 맡아서 키우게 됐어요. 본업 외 시간엔 그 친구 돌보는 게 거의 전부인 그런 상황입니다.
최웅희: 요즘 축구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원래 조기 축구를 하는데 너무 바빠서 한 달 정도 못 나가고 있어요. 단독 공연 끝나면 다시 나가야죠.
김춘추: 단독 공연 준비에 집중을 많이 하고 있어서 그거 말고는 딱히 없는데.
최웅희: 나도 저렇게 말할 걸.
김건재: 저도 사실 단독 공연이 제일 큰 관심사고요(웃음). 그래서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P <Machine Boy>의 앨범 소개글엔 이렇게 쓰여 있죠. “차가움과 뜨거움, 빛과 어두움, 이별과 출발 같은 반대되는 속성 간의 역학관계가 느껴진다.” 이번 앨범은 그 극과 극을 함께 담은 걸까요, 두 양극단이 섞인 그 사이 어디쯤을 지향한 걸까요?
김한주: 사실 만드는 입장에서 그런 요소를 크게 의도하진 않았어요. 다만 딱히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요. 실리카겔이라는 밴드의 흐름도 어떤 부분에서는 보수적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되게 진보적으로 접근하려는 양가성이 계속 존재하는 그룹이다보니 음악적 결과물에도 자연스럽게 티가 나는 것 같아요.
왼쪽부터 김한주가 착용한 볼로타이는 불레또, 슈즈는 레페토, 재킷, 셔츠, 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김건재가 착용한 재킷, 셔츠, 타이, 팬츠, 슈즈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김춘추가 착용한 슈즈는 레페토, 재킷, 셔츠, 타이, 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최웅희가 착용한 슈즈는 레페토, 재킷, 셔츠, 타이, 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실리카겔 음악의 어떤 점에서 보수적이고 또 진보적인 성향이 드러나나요?
김한주: 기존 대중음악의 진행 방식을 답습하지 않으려고 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아요. 재밌게 하려다 보니까 계속 새로운 방식으로 작곡하고 진취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그러면서도 녹음이나 소리를 가공하는 과정에서는 마냥 새롭게 들리는 것에만 초점을 둬서 가벼워지거나 증발되는 걸 피하려고 하죠. 저는 그걸 저희만의 장인 정신이라고 부르는데 가끔 이런 책임감이 보수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요. 반대로 다른 뮤지션들의 워크 플로를 보면 그런 걸 안 하는 분들이 많아서 오히려 이런 고집이 저희의 진취적이고 유니크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EP <Machine Boy>의 출발점은 어디였나요?
김건재: 데모가 됐든 짤막한 모티프든 뭔가를 가져와서 합쳐보는 세션을 가졌어요. 그때 저처럼 이게 뭐야 싶은 걸 갖고 온 멤버도 있는 반면 완곡을 다 써온 경우도 있었죠.
김춘추: 거기서 발견된 아이디어들이 지금의 수록곡들로 발전했어요.
수록곡 ‘Machineboy空’은 록과 전자음악과 불쑥 등장하는 피아노 독주까지, 여러 요소가 섞여 있죠. 실제 기획 단계부터 그런 의도였나요, 혹은 만들다보니 그렇게 되었나요?
김건재: 처음 제가 가지고 간 건 몇 가지 선율이 있는 코드 진행이나 동기 정도였는데 그걸 한주가 분해하고 조립해서 지금의 구성으로 만들어온 거죠.
김춘추: 이번 앨범 수록곡 중에서 비교적 대안적인 구성을 지닌 곡이에요. 저희가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충분히 소화할 수 있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다듬는다는 생각 없이 한주가 처음 만든 디자인 그대로 녹음했어요.
김한주: ‘Machineboy空’은 조금은 의도적인 곡이에요. 오랜만에 비교적 긴 포맷의 EP를 발매하게 되다 보니 다른 수록곡들에 비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거죠. 게다가 원래 저희가 연주곡을 많이 썼기 때문에 그때처럼 아예 곡 길이도 늘리고 피아노도 넣어보고 싶었어요.
‘Realize’은 이번 앨범의 타이틀 곡이에요. 반 년 정도 공연장에서만 선보인 미발매 곡이었는데, 이번 EP에 수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김한주: ‘NO PAIN’도 작년 초에 라이브로 먼저 공개하고 여름까지 기다렸다가 발매를 한 케이스였어요. 그때부터 공연장에서 먼저 연주한 다음에 발매까지 기대감을 조성하는 재미를 느꼈어요. ‘Realize’도 역시 음악적인 카리스마가 있다고 생각한 곡이었고 특히 라이브로 연주할 때 돋보이겠다는 확신이 들었던 거고요.
이번 앨범에선 ‘앙상블’을 강조하기도 했어요. 각자의 역할에 대해 이전까지와 다소 다르게 접근한 건가요?
김춘추: 이전에도 저희는 밴드로서 함께 무대에 오르는 멤버들이 있기에 성립되는 구조의 연주 형태와 앙상블을 지향한 건 변함이 없어요. 그런데 최근 발매한 ‘NO PAIN’을 계기로 곡 자체의 힘과 그걸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연주와 녹음 방식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번엔 따로따로 한 명씩 녹음하는 방식보다 최대한 우리가 한 공간에서 한 번에 연주하는 그 합과 에너지를 음원에 꼭 담고 싶었어요. 그게 우리의 강점이니까요.
여전히 스스로를 록 밴드라 여기나요?
김한주: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데요. 시기마다 바뀌는 것 같아요. 특히 제가 군대에 있을 때는 록 밴드의 이미지가 많이 싫었어요. 록 음악 안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게 나오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고 작곡가 입장에서도 여기에 갇히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나온 곡이 ‘Kyo181’이에요. 대안을 찾고 싶은 마음 때문에 보컬 편곡에 화음을 많이 넣고 전자적인 효과음도 쓴 사운드를 만든 거죠. 그런데 최근에는 또 록을 긍정적으로 보게 됐어요. 실리카겔을 통해 계속 우리가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쓰다 보면 그게 결국 록 음악이니까요. ‘NO PAIN’이나 ‘Realize’도 그렇고.
최웅희: 저는 좀 다른데 전 록의 영향을 많이 받고 살아온 사람이에요. 록이라는 말 자체가 특정 밴드나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가 이제는 아닌 것 같아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대안적인 형태도 튀어나온 거죠.
김춘추: 밴드라는 형태와 그 형태로 할 수 있는 독특한 작업 방식이 중요한 것 같아요. 밴드로 꼭 록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 안에서 록을 하든 팝을 하든 힙합을 하든 펑크를 하든 실리카겔은 그것에 한계를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다만 저희는 록이라는 장르를 꽤 잘하는 편이고 동시에 충분히 다른 것도 해볼 수 있는 밴드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다른 것도 잘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김건재: 저는 록 밴드라는 말의 가치보다는 사람 네 명이 만나 제 결함을 메워준다는 점이 좋아요. 그리고 음악을 언어로 본다면 이 넷이 모여서 뭔가를 전달하는 게 우리에게 있어 최적의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NO PAIN’부터 작사에 유독 신경쓰게 됐다고 인터뷰한 적도 있는데 계기가 있나요?
김한주: 발표하지 않은 곡까지 포함하면 살면서 정말 많은 곡을 써왔어요. 근데 이제 음악적인 원동력만 가지고 음을 배열하고 만들다 보니까 조금씩 싫증이 나더라고요. 듣기에는 좋은데 뭔가 이상하게 아쉬운 기분도 들었고요. 제가 존경하는 뮤지션들은 정치적인 메시지부터 정서적인 측면까지 가사가 없는 곡이라 하더라도 외부의 영향이나 자기 내부로부터의 이야기와 의도를 잘 표현하는데 제 곡은 그런 부분이 굉장히 비어 있었거든요.
어떻게 하면 나도 ‘진짜’처럼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음악을 솔직하게 대하고 그렇게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작사뿐만 아니라 악기를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완성도보단 제 자신과 멤버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따르려고 해요.
이번 EP에서도 꼭 하고 싶은 이야기나 핵심 키워드가 있나요?
김한주: 같은 시기에 쓴 ‘NO PAIN’과 ‘Mercurial’의 가사를 비교하면 듣는 재미가 더 클 거예요. ‘NO PAIN’은 단순히 긍정적인 느낌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가려고 노력하는 느낌이고 ‘Mercurial’은 반대로 약간 비관적인 내용이거든요. 그래서 ‘NO PAIN’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Mercurial’의 비관적인 아이가 될 수도 있다고 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사실 이번 EP도 가사가 들어간 모든 곡들에 흥미로운 요소가 많을 거예요. 예컨대 ‘Realize’에서도 춘추는 ‘웃음’이라고 하지만 그다음에 제가 부르는 파트에서는 ‘눈물’이라는 대비되는 표현을 써요. 그리고 ‘Budland’는 얼핏 들으면 추상적인 내용 같지만 사실 이 곡도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거든요. 그걸 추리해 보는 재미를 위해 명확한 의미를 지금 밝히고 싶진 않아요.
왼쪽부터 최웅희가 착용한 톱은 프롬아를, 팬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김춘추가 착용한 팬츠는 프롬아를, 셔츠, 벨트, 슈즈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김한주가 착용한 셔츠, 이너, 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김건재가 착용한 톱, 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뮤직비디오와 비주얼 또한 실리카겔의 중요한 정체성일 거예요. 최웅희의 연출작 ‘Realize’ 뮤직비디오와 애니로 제작한 ‘Budland’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할 예정이죠. 비주얼에 대한 결정은 누가 어떻게 주도하나요?
최웅희: 제가 뮤직비디오의 감독을 맡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저희 멤버 전원이 비주얼에 대한 관심과 욕심이 있고 각자가 좋아하는 게 뚜렷하기 때문에 한 명이 주도해서 결정하는 느낌은 아닌 것 같아요.
김한주: 물론 멤버들이 비주얼에 대한 의견을 내지만 ‘어떤 사람이랑 하자‘ 같은 시발점을 만드는 차원이지 작업 자체에 크게 관여한 건 아니에요. 그만큼 믿을 만한 분들과 작업하게 됐기 때문이죠. 저희는 저희 자리에서 본업인 음악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Realize’도 웅희가 연출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고 ‘Budland’ 또한 남지희 작가님이 먼저 연락을 주셔서 최소한의 단서 정도만 드리고 작업을 맡겼어요.
원래도 그런 편인가요, 더욱 음악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나요?
김한주: 점점 음악 쪽으로 기우는 것 같고 이게 좋은 것 같아요. 뮤직비디오는 멜트미러, 사운드는 신재민 감독님, 사진은 하태민 작가님처럼 저희가 거의 고정적으로 함께 하는 파트너들이 있고 그런 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저희도 음악에 집중하면서 이들의 작업물을 곁눈으로 확인해도 걱정 없는 상태를 목표로 두고 있어요.
다음은 뭘까. 실리카겔을 보는 마음이 그럴 거예요. 미리 장기적으로 계획하는 편인가요?
김건재: ‘올해 안에 2집을 내고 싶습니다’ 정도.
김한주: 이것도 개인차가 좀 있는 것 같은데요(웃음). 저는 큰 계획을 세워놓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이번 예스24 라이브홀 공연도 사실 제가 작년, 재작년부터 바라왔던 거예요. 희망 사항을 정해두면 그걸 이루려고 저도 모르게 노력을 하게 되거든요. ‘이렇게 해야지. 난 이렇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됐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 너무 바빠서 그다음 건 생각 못 했어요.
김춘추: 각자의 사정거리가 조금씩 달라서 다행이라고 할까요. 저는 멀리 안 보는 편이라 눈앞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하는 인간인데 멤버들이 자신의 사정거리 안에 있는 것들을 각자 철저하게 챙기니까 결과적으로 뭔가 이루어지는 거죠.
김한주: 이런 부분이 서로 균형이 맞는 것 같아요. 누군가 이렇게 가려고 하면 누군가는 잡아주고 반대로 누군가는 또 조금 밀어주고요.
EP를 발매하자마자 공연이 예정되어 있죠. 이번 공연은 어떻게 다른가요?
김한주: 음악과 음향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김건재: 정통 음악 공연이에요.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탄탄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춘추: 게스트 없이 저희 멤버들만 올라가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어요. 작년 <Syn.THE.Size> 공연은 단독 공연을 좀 크게 만들어보자는 맥락으로 여러 친구들과 같이 공연을 했는데 이번엔 밴드로서 우리끼리 같이 호흡하는 에너지를 최대한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까 말한 앙상블 얘기와도 연결되는 맥락이 있죠. 햇수로 6년 만에 EP 앨범이 나온 만큼 신곡의 비중도 높고요. 장소가 지금까지 저희가 올랐던 공연장들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크고 전석 스탠딩으로 진행된다는 점도 달라요. 실리카겔이라는 밴드가 상승 곡선을 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상황이라 이 모든 부분들이 기대해 볼 만한 포인트가 아닐까 해요.